로그인 | 회원가입 | CMS후원
2018.07.23 07:00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세계  |  미디어  |  칼럼  |  서팡게시판  |  여행게시판
 
커뮤니티홈 > 토론게시판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복지 없는 성장"이었다
반공 메카시즘 | 2018-02-16 08:05:33 | 212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복지 없는 성장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복지국가는 말 그대로 ‘꿈’에 그쳤고, 사회복지정책은 경제개발정책에 종속되어 ‘복지 없는 성장’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소득의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국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노동시장을 떠나서는 자신의 복지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품화된 사회였다.


☞ 신동면 경희대학교 교수


1.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추도사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해 열렸던 추모식에서 박 대통령의 큰 딸인 박근혜 국회의원은 추도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룩하셨지만,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박근혜, 2010.10.29.)”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추진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궁극적 꿈이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는 것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였던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사회복지와 노동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와 노동이 정책의제로 채택되기 어려웠고, 정책의제로 채택되었다고 하더라도 경제성장에 종속되어서 ‘복지 없는 성장’과 ‘노동 없는 성장’이라는 불균형 성장을 초래했을 뿐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복지의 발전을 이루지 못했지만,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이 되는 생활보호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료보험법·국민복지연금법·사회보장에 관한 법 등 사회복지 관련 법률들을 제정했다. 이들 중 일부는 법제정 이후 바로 시행되었으나, 의료보험은 14년이 경과한 후에 도입되었고 연금보험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 제정된 사회복지 관련 법률들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골격을 형성했고, 오늘날 한국 복지국가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근로능력이 없는 극빈자를 보호 대상으로 최소한의 생계비를 제공하는 공공부조와 보험료 납입과 급여에 대한 법적 권리를 연결하는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잔여적·선별적 사회보장체계를 도입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유산은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기본적 운영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보장 수준이 낮고,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국가의 재정 부담을 최소화한 것은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되었던 잔여적·선별적 사회보장체계의 제도적 유산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사회보장제도에 초점을 두고 사회복지정책의 투입과 산출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는 박근혜 국회의원의 주장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박정희 정권이 왜 사회복지에서 매우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며 ‘복지 없는 성장’을 초래했는지, 다시 말해서 복지국가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을 규명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글에서는 사회보장관련 법률, 정부 문서, 인터뷰 자료, 대통령 전기와 연설문 등을 중심으로 문헌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2. 자본주의체제에서의 사회복지정책이란?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체제의 필수적인 발전의 산물이다. 또한 복지국가는 정치체제에 의한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며 사회복지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재분배체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한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은 현 단계 한국 자본주의체제에서 국가와 시장 간의 관계를 반영한 복지정책의 결과이다.


사회복지제도가 이와 같이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반영해 결정된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학자로 에스핑-앤더슨(Gosta Esping-Andersen) 폼페우파브라대학교 교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복지국가라는 용어 대신 복지레짐[Welfare regime]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사회복지제도의 법적·조직적 특성이 국가와 시장 간의 관계, 즉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반영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복지레짐은 한 사회에서 사회복지를 둘러싼 사회연합의 이해와 선호를 구현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복지를 둘러싼 공급 주체들(국가·시장·가족)의 역할과 책임을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복지레짐의 성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변화하는 사회연합의 이해와 선호를 반영하여 변화한다. 에스핑-앤더슨 교수는 국가구조, 노동조직의 특성, 좌파정당의 특성과 집권력, 정치적 지배연합의 성격 등에 의해 복지레짐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노동시장의 제도적 특성이 사회보장제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보장제도는 현행 고용체제의 특성을 유지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시장제도와 사회보장제도 간에 상호 보완성을 지닌다는 에스핑-앤더슨 교수의 지적은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을 주장하는 비교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체제에서 기업들은 개별 국가의 생산제도(상품생산방식·금융시장구조·노동시장·노사관계·직업훈련·기업지배구조 등)의 차이에 따라 전략적으로 활동하며 사회복지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와 선호를 지니게 된다. 그 결과 개별 국가에서 생산제도와 사회보장제도 간에 제도적 보완성(institutional complementarity:한 제도의 존재가 다른 제도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관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생산제도와 사회보장제도 간의 제도적 보완성은 정치체제를 통해 매개된다. 정치체제는 경제정책(산업정책·금융정첵·노동정책·인적자원개발정책 등)과 사회복지정책의 선택을 통해 생산레짐과 복지레짐을 형성해가고, 이 둘 간의 원활한 작동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때 정책결정자들의 정책 선택은 기업들의 이해와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 혹은 완화하는 것’이기에 생산제도와 사회보장제도 간의 제도적 보완성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살펴본 자본주의체제 사회복지정책 과정의 특징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복지정책의 변화를 사회연합(social coalition), 제도적 환경(institutional settings), 정책연계(policy-linkages)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사회복지정책의 변화는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연합의 균열에 의해 촉발되는 역동적이며 연속적인 과정이다. 정책결정자에 의한 사회복지정책의 선택은 제도적 환경에 의해 제한받는다. 왜냐하면, 제도적 환경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참여자를 사회화시키고, 참여자 간 권력관계를 규정하고, 참여자에 대한 제재와 유인의 기제로 작용하며, 참여자 간 집합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제도적 환경은 정책망(policy-network), 정책아이디어(policy ideas), 비토점(veto points)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단과 슈버트(Jordan & Schubert, 1992.)에 따르면, 정책망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행위자들 간의 연계체계를 의미한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정부와 민간 부문의 참여자들(기업조직·노동조직·이익단체 등)은 전문지식의 공유 및 의사소통, 신뢰 형성, 그리고 여타 자원을 교환하는 상호의존적 연계관계를 형성하고, 정책 형성 및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정책아이디어는 정책결정자들이 지니는 세계관·규범적 신념·인과관계에 대한 이해 등을 의미하는데, 정책결정자들은 정책아이디어에 근거해서 특정 상황에서 구체적인 정책 선택을 하게 된다.


비토점은 정책 과정의 참여자가 자신의 전략에 따라 결정사항을 뒤엎을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 입법부의 구성, 행정부 내 부처 간 관계, 선거 등에 따라 비토점의 수와 위치가 결정되며, 이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전략과 정책 선택에 영향을 준다. 또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연계되어 정책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상호영향을 미친다. 특히, 경제정책은 사회복지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정책결정자들의 정책 선택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사회복지정책의 내용과 형식에 영향을 미친다. 종합하면, 자본주의체제의 사회복지정책 선택 과정에서 제도적 환경을 구성하는 정책망, 정책아이디어, 비토점, 그리고 정책연계는 정책의제 설정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활용 가능한 정책 수단의 범위를 제한한다.


3. 박정희 정권의 사회복지정책


⑴ 사회보장지출 분석


사회보장을 위한 정부의 노력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사회보장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경제기획원 자료《재정통계연감》을 토대로 작성된 도표〈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보장 재원 구성과 사회보장지출 수준 추이〉는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사회보장을 위한 공공 지출이 매우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2년 GDP 대비 공공 사회보장지출 수준이 1.3%였는데,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연도인 1979년에도 공공 사회보장지출 수준이 1.3%였는데,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연도인 1979년에도 공공 사회보장지출 수준은 GDP 대비 1.9%에 머물렀다. 특히 1979년을 제외하면, 박정희 정권의 전 기간 동안 공공 사회보장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를 넘지 못했다.


공공 사회보장지출 수준이 이처럼 낮았던 박정희 정권에서 시민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은 가장의 손에 달려 있엇으며, 가족 구성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간 시장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본인 부담으로 구입해야 했다. 그 결과 개인별 복지수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에스핑-앤더슨(Gosta Esping-Andersen) 폼페우파브라대학교 교수가 한 개인이 자신의 복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시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제시한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 개념을 통해 설명하면,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 사회의 탈상품화 정도는 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공공 사회보장지출의 재원 구성을 보면, 1962년 사회보장 재원에서 국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82.9%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왜냐하면, 1960년대 초반까지 사회보험제도가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 조세에 의한 적극적 공공부조 실현이 재원 부족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보장을 위한 정부 재원은 1960년대 말까지 외국의 구호금품과 원조, PL 480-Ⅱ에 의한 미국 잉여농산물 원조에 크게 의존해 있었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공공부조 차원에서 실시한 정부의 영세민 대책은 응급구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양곡 중심의 현물지급이 대부분이었다.


사회보장 재원에서 정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회보험제도들이 도입되어 보험료 수입이 확대됨에 따라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1962년에 처음으로 공무원연금이 그리고 이듬해인 1963년에 군인연금이 도입되었고, 1964년에 산업재해보상보험이 도입되면서 보험료가 징수되엇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은 박정희 정권에서 지속적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상시 5백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도입되었던 산업재해보상보험은 1965년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1차 개정을 시작으로 1968년에 제5차 개정을 거치며 상시 50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까지 적용범위를 확대했다. 1970년에 제1차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과 이에 따른 시행령 개정을 통해 상시 30인 이상을 고용하는 사업장으로, 1975년에 상시 16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으로 적용범위를 확대했다. 1976년부터 사고위험률이 높은 업종인 광업 및 제조업 중에서 화학·석탄·석유·고무·플라스틱 업종에서 상시 5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으로 적용범위를 확대했다. 한편, 의료보험이 1977년에 상시 5백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을 대상으로 도입되었고, 1979년에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직원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요컨대 특수 직역 연금(공무원·군인·사립학교 교직원), 산재보험, 의료보험의 도입과 적용범위의 확대에 따라 사회보장 재원에서 차지하는 보험료의 비중이 증가했고, 그만큼 정부 예산의 비중은 감소했다.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해인 1979년에 사회보장을 위한 재원에서 정부예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48.3%로 감소했고, 사회보험료 비율은 38%를 기록했다. 사회보장을 위한 재원 구성의 변화는 박정희 정권에서 정부의 재원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사회보장제도를 수립하고자 했던 것을 잘 보여준다.


⑵ 사회보장제도의 입법 과정


○ 공공부조의 도입과 운영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6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박정희 군부세력은 국회를 해산했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곧이어 군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바꾸어 통치기구를 새롭게 정비했다. 1961년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제2공화국 장면 정권에서 계획되었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1962년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제1차 계획에서는 “모든 사회경제적 악순환의 시정과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구축에 목표를 두고, 전력·석탄 등 에너지공급원의 확보, 농업생산력 증대,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 충족, 고용의 증가와 국토 보존 및 개발, 수출증대, 기술의 진흥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군부세력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혁명공약에 맞추어 1961년 12월에 생활보호법(법률 제913호)을 제정했다.


생활보호법에서는 노령·질병 기타 근로능력의 상실로 인해 생활유지 능력이 없는 자 등에 대한 보호와 그 방법을 정했다(생활보호법 제1조 목적). 보호대상의 범위로 65세 이상의 노인, 18세 미만의 아동·임산부·불구·폐질·상이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근로능력이 없는 자 등에 해당하는 자로서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할 능력이 없는 경우로 정했다(생활보호법, 제3조 보호대상의 범위). 보호의 수준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햇지만(생활보호법 제4조), 보호의 종류는 생계보호·의료보호·해산보호·상장보호로 제한했다(생활보호법 제5조). 사실상, 생활보호법은 생활력을 잃은 구호대상자에게 응급구호를 했던 1944년에 제정된 ‘조선구호령’의 규정보다 구호범위가 약간 늘었을 뿐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생활보호법은 모든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한다는 공공부조의 기본 목표를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법안 자체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절대빈곤 상태에 놓여 있는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생활보호법의 입법은 군부세력이 민생고의 시급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에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러나 생활보호법의 제정과 시행령의 공포(1962년 7월 23일 각령 제893호)에도 불구하고, 정부 재정 여건의 미비로 공공부조는 실효성을 갖기 어려웠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는 원년인 1962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신년 시정방침 연설에서 사회보장제도 수립 방침을 밝히면서 동시에 사회보장에 대한 신중한 태도를 강조했다.


“부조와 보험을 기간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확립하여 국민생활 향상과 복지사회건설을 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교육과 사회의 보장시책은 단기적인 평가는 불허하므로, 가능한 한 졸속주의와 급진적 개혁은 이를 신중히 처리할 것입니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박정희 의장의 신중한 태도와 정부의 재정 여건 미비는 공공부조 확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생활보호법 시행령(제16조)에 따라 보건사회부에 중앙생활보호위원회를, 서울특별시·도 및 시·군에 각각 지방생활보호위원회를 두도록 했지만, 지방생활보호위원회가 설치되지 않았거나 있어도 제대로 운영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호대상자의 욕구는 무시된 채 주어진 예산 범위 내에서 행정편의주의에 따라 보호대상자의 수와 보호수준이 결정되었다. 특히, 1964년부터 영세민 구호대책이 자조근로사업을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영세민 구호와 근로사업을 연계시켰다. 자조근로사업은 정부가 PL 480-Ⅱ에 의한 양곡지원이 중단된 이후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974년부터 영세민 취로대책비를 국고에서 우선적으로 배정하도록 했고, ‘새마을 노임소득사업’으로 명칭을 바꿔서 자조근로사업을 이어갔다. 따라서 자조근로사업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적 영세민 대책이었고, 대표적 공공부조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조근로사업은 영세민들을 위한 임시방편적 구호 기능을 지녔으나, 일반 노임보다 턱없이 낮게 책정된 데다 현금이 아닌 양곡으로 지급된 임금, 짧은 취로일수, 원거리에 위치한 취로사업장 등의 문제로 인해 영세민을 위한 소득보장정책이나 자활정책이 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당시 보건사회부 공무원이었던 최수일 전차관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조근로사업은 무노동 무상구호를 지양하고 양곡구호와 지역사회개발을 연계시킴으로써 구호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으로, 이 아이디어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검토 지시되고, 정희섭 보사부장관에 의하여 발전 수행되었다”는 증언이 자조근로사업의 본질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한편, 생활보호법에서 보호 종류로 포함되어 있던 의료보호는 유명무실한 사업이었으나, 1977년 12월 의료보호법(법률 제3076호) 제정을 계기로 생활보호법에서 분리되어 1978년부터 시행되엇다. 의료보호법에서는 생활보호대상자, 사회복지시설 수용자, 이재자, 국가유공자 및 그 가족 등이 의료보호를 받도록 정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생활보호 대상자 중학교과정 수업료지원 규정(대통령령 제9495호)’을 두어 생활보호대상자의 중학교 재학 자녀에게 수업료를 전액 보조하는 교육보호를 실시하게 되었다.


종합하면, 박정희 정권에서는 저소득 극빈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보호책임은 무시되었고, 저소득 극빈자의 자립과 자조의 원칙만 더욱 강조된 것이다. 경제개발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시민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공공부조 사업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공공부조는 무능력자를 대상으로 한정해 수급범위를 최소화했고, 생계급여는 양곡 중심의 현물급여로 응급구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무능력 극빈자만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빈민(Deserving poor)으로 간주하여 최소한의 생계급여를 하고, 근로능력자에게는 노동을 강제했던 19세기 영국의 구빈법체제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 사회보험의 도입과 연기


박정희 의장의 1962년 시정방침 발표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사회보험제도 도입을 위해 1962년 3월 보건사회부 산하에 ‘사회보장제도심의위원회(이하 사보심)’을 설치했다. 사보심은 1963년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받았다. 사보심은 종합반·공공부조반·의료보험반·노동보험반으로 나뉘어 해당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분과에서는 사회보장제도 방안 설계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사회보험 도입 과정에서 1962년 7월 28일 박정희 의장의 ‘사회보장제도 확립에 대한 지시 각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시 각서에서 박정희 의장은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복지국가의 조속한 실현이 궁극적 목표임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①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고 실업·질병·노령 등의 생활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여 복지국가를 조속히 이룩함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임.


② 이미 생활보호법을 공표하여 요구호자에 대한 부조를 실시하고 있지만, 국민·기업주·정부가 함께 참여하여 연대적으로 국민생활을 보장하는 항구적인 사회보장제도가 경제개발과 병행하여 추진되어야 할 것임.


③ 사회보장제도의 중요한 부분인 제 사회보험 중 실시에 비교적 용이한 보험을 선택하여 착수하고 이 시범사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적합한 제도를 연구 발전시켜 종합적인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토록 조치할 것.(국가재건최고회의, 문사 제683호, 1962년 7월 28일)˝


이와 함께 지시 각서에서는 국민·기업·정부가 참여하여 실업·질병·노령 등의 생활위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사회보험을 순차적으로 도입해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의장의 지시 각서는 사보심의 활성화와 사회보험관련 법률의 입법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사보심은 의료보험반을 중심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 도입을 위한 제도 설계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의장은 1963년 신년 시정방침에서 사회보장제도 확립을 위한 구체적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밝혔다.


“광범한 사회보장제도 실시의 일환으로서 의료보험과 노동자를 위한 재해보험제도를 발족시킬 것을 기약하는 바입니다(박정희 국가제건최고회의 의장 1963년 시정방침, 1963년 1월 5일).”


의료보험과 재해보험 등 사회보험 도입 계획이 공표된 이루, 1963년 한 해 동안 한국 사회보장제도 발달 과정에서 사회복지 관련 법률의 ‘대량 형성기’라고 일컬을 정도의 법률 제정이 이루어졌다. 1963년 1월 군인연금법(법률 제1260호)이 제정되었고, 11월에 사회보장제도의 확립과 효율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사회보장에 관한 법(법률 제1473호)과 근로자를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산업재해보상보험법(법률 제1438호)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12월에 근로자와 근로자의 부양가족을 위해 질병·부상·사망 또는 분만에 대해 보험급여를 실시하는 의료보험법(법률 제1623호)이 제정되었다.


사회보험 입법이 대량으로 이루어졌던 1963년에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를 넘지 못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절대빈곤에 놓여 있던 시기였다. 또한 군사정권에서 이루어진 노동통제와 비민주적 정치체제 아래에서 국가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정치·사회적 요구도 없었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왜 박정희 군부는 사회·경제적 상황에 걸맞지 않게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사회복지 관련 법률들을 대량으로 제정했을까?


사회보험 관련 입법이 무더기로 처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된 것은 1962년 공무원연금법과 1963년 군인연금법, 그리고 1964년에 도입된 산업재해보상보험뿐이었다.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의 제도 내용을 살펴보면, 가입자가 월 보수의 3.5%를 부담하고 정부가 월 보수의 2.3%를 보담하도록 햇으며, 가입 기간이 20년 경과하면 퇴직연령에 상관없이 연금을 수급할 수 있도록 했다. 연금의 본래 목적이 노년기의 소득 안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0세 이상으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국의 공무원연금과 군인연금은 매우 예외적 성격을 갖는 제도로 설계되었다. 이는 박정희 군부세력이 쿠데타 이후 공무원과 군인을 정권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특혜적 성격의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64년에 도입된 산업재해보상보험은 이미 노동법에 따라 시행되어왔던 산업재해에 관한 고용주의 보상책임을 사회보험 형태를 통해 법정화한 성격이 강했다.


1963년 12월에 제정된 의료보험에서는 의료보험의 임의가입을 원칙으로 했다. 당초 사보심에서 마련한 의료보험법안은 사회보험의 기본 원칙인 강제가입 조항을 포함했지만 최고회의 상임위원회의 회의에서 이를 삭제했고 임의가입 조항으로 대체게 법제화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지만 시범사업의 형태로 몇 개의 사업장에서 임의가입을 적용한 의료보험이 시행되었을 뿐이다. 의료보험 시범사업은 임의가입 원칙에 의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역선택의 문제를 피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보험조합 운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제1차 의료보험법 개정에서는 적용 대상을 모든 국민으로 확대했고, 임의가입 원칙에서 근로자·군인 및 공무원은 강제가입으로 바꾸었고, 자영업자는 임의가입을 할 수 있도록 수정했다. 그러나 의료보험법 실시에 필요한 시행령이 마련되지 않아 의료보험은 여전히 시범사업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의료보험법 시행령이 제정되지 못한 것은 1970년대 초반 경제개발 우선주의를 신봉해온 발전국가의 정책결정자들이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믿었고, 1973년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경제적인 추가부담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76년까지 박정희 정권의 보건 관련 지출의 대부분은 공공위생과 예방사업에 국한되었으며, 의료시설의 대부분은 민간기관이었다(1978년 기준으로 민간 의료기관은 86.8% 수준). 그 결과,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전적으로 환자 개인의 의료비 지불 능력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고, 의료기관은 지불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도시 지역에 편중되었다. 예컨대, 전체 의사의 87%와 의료기관의 90% 이상이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중산층 이상의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의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농어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의료시설 부족과 의료비용 부담으로 인해 의료 서비스 이용이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6년에 제2차 의료보험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1977년에 들어 의료보험이 도입되었다. 의료보험 시행에 맞추어 저소득층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해 의료보호제도가 도입되었다. 의료보험법에서는 의료보험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제1유형은 5백인 이상 종업원을 둔 기업에 근무하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강제가입 원칙 아래 시행하는 것이다. 제2유형은 제1유형에 포함되지 않은 5백인 미만 기업에 근무하는 근로자와 농어민 및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임의가입 원칙 아래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사회 기반의 의료보험은 시행되지 않았으며, 1977년부터 5백인 이상 기업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1979년 7월에 의무가입 조건이 완화되어 3백인 이상 종업원을 고용한 기업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1979년 1월부터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위한 의료보험이 시행되었다. 의료보험연합에서 작성된 도표〈의료부조 및 의료보험 적용 비율〉을 보면, 1977년에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된 국민은 전체 국민의 8.8%였으며 의료부조를 받는 국민이 5.7%였다. 1979년에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국민이 전체 국민의 21.2%로 증가했고, 의료부조를 받는 국민은 5.7%였다.


박정희 정권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년~66년)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년~71년)의 성공적 추진을 통해 급속한 경제개발을 이룩했다. 지난 10년간의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빈곤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자기 강화적 속성을 지닌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복지지출이 비생산적이고 낭비적인 유출이라는 인식을 더 굳혀갔다. 1970년대 10년 동안 박정희 정권은 사회복지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에 이루어진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은 1977년에 도입된 의료보험이 유일했다. 그런데, 유신정부의 수립 이후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예상 밖의 내용을 발표했다.


“정부는 1974년부터 국민복지연금제도를 실시, 퇴직연금·장해연금·유가족 연금 등을 모든 근로자들에게 점차 확대시켜 나갈 것이며, 1981년까지 서민주택 250만호 건립, 1970년대 후반까지 의료보험제도 도입 등을 추진할 것이다(〈조선일보〉, 1973.1.13.).”


박정희 대통령의 발표에 따라 세번째 사회보험제도로서 국민복지연금법(법률 제2655호)이 1973년 12월에 제정되었고, 1974년부터 30인 이상 사업체를 대상으로 강제 적용하고 자영업자는 임의가입하는 연금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국민복지연금법 시행령, 제6조). 그러나 1973년 말에 발발한 석유파동으로 인해 국민복지연금의 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1974년 1월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3호’에 따라 국민복지연금제도 시행이 1년간 연기되었고, 1974년 12월 국민복지연금법 개정으로 다시 1976년 1월 1일로 시행을 연기했다. 1975년 12월 국민복지연금법의 재개정을 통해 복지연금의 시행시기를 정하지 않음으로써 무기한 연기되었다. 복지연금제도의 무기한 연기를 단행한 이유로 박정희 정권은 석유파동으로 인해 기업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연금보험료 징수가 기업의 생산비용에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연금제도는 1986년 국민연금법의 제정을 통해 1988년에 가서야 도입될 수 있었다.


국민복지연금에서 노령연금은 가입자가 20년 이상 연금에 가입하여 기여금을 납입하고 60세에 달할 때 연금을 수급하도록 정했다. 이는 연금수급 연령을 정하지 않은 공무원연금 및 군인연금과 다르다. 연금 보험료는 제1종 가입자(표준보수월액이 1만 5천원 이상인 자와 미만인 경우 본인 희망자)의 경우 표준보수월액 대비 4%를 사용자가 그리고 가입자는 3%를 부담하도록 했고, 표준보수월액이 1만 5천원 이하인 가입자의 기여금에 대해서는 국고에서 표준보수월액의 1%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리고 제2종 가입자(자영업자)는 보험료 전액을 본인이 부담하도록 정했다. 보험료의 징수는 국세청이 담당하며, 기금 운용은 보건사회부장관 소속의 국민복지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기금운영 방법은 국민투자기금법에 의한 채권 인수 또는 국민투자기금에 예탁,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금증식사업 또는 국민복지증진사업 등으로 규정하여, 경제개발사업은 물론 복지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장되었던 1973년에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 국민의 3.3%에 불과했다. 그 당시는 인구구조의 고령화로 인해 연금 도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가 전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복지연금 도입을 정책 의제화했고, 국민복지연금법이 신속하게 제정된 원인은 무엇일까? 국민복지연금은 박정희 정권이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내자동원의 한 수단으로 고려되면서 단시일 내에 입법화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이에 더하여 양재진 연세대학교 교수는 유신헌법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1973년 2월 27일)를 앞두고 유신정부의 지지 동원 수단으로 복지연금제도가 활용되었다고 지적한다.


종합하면,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를 위해 응급구호 성격의 최소한의 공공부조와 사회보험에 기반을 둔 사회보장제도 확립을 모색했다. 1960년대 초반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의료보험법이 제정되었으나 산재보험만이 실행되었고 의료보험은 법제정 이후 14년이 경과한 1977년에 가서야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다. 산재보험과 의료보험의 적용 범위는 기업의 재정 여건을 고려하여 대기업부터 도입하고 점진적인 확대를 모색했다. 산재보험과 의료보험에 소요되는 재원은 가입자와 사용자의 보험료를 통해 충당하고 국가 예산 지원은 관리운영비를 중심으로 최소화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내자동원의 수단으로 고려되었던 국민복지연금은 법제정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황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보험 입법 그 자체가 사회보험의 실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복지 관련 법률의 입법에도 불구하고 법이 실효성을 갖지 못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사회보장에 대한 기본 태도에서 드러난다. 1963년 11월에 제정된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법률 제1437호)에서는 사회보장의 범위와 정부의 역할 및 내용 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2조(사회보장의 정의)이 법에서 ‘사회보장’이라 함은 사회보장에 의한 제급여와 무상으로 행하는 공적부조를 말한다.


제2조(사회보장사업의 관장 및 그 내용)①정부는 사회보장사업을 행하며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일부를 지방자치단체 또는 기타의 법인으로 하여금 행하게 할 수 있다.


②정부는 사회보장사업을 행함에 있어서 국민의 자립정신을 저해하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


③사회보장사업은 국가의 경제적 실정을 참작하여 순차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④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사회보장사업을 지방자치단체 또는 법인으로 하여금 행하게 할 경우에는 그 비용은 국고가 부담한다.˝


서구 복지국가의 발달 과정을 보면,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뿐 아니라 사회 서비스가 핵심적 요소가 되어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에서는 사회보장의 범위를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로 제한했다. 사회보장제도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며 사회권을 확립하기 위한 제도적 토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에는 이러한 규정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사회보장사업을 행함에 있어서 국민의 자립정신을 저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국가에 의한 사회보장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사회보장제도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제정한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에서 사회복지가 개인의 근로동기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먼저 걱정했다는 것은 사회복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이 한국 사회보장제도의 성격을 규정하는 골격을 형성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보장제도는 보편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국민생활의 최저선을 보장하고자 했던 ‘베버리지원리’를 따르지 않았고, 보험료 부담에 따라 급여에 대한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비스마르크사회보험원리’에 근거하여 수립되었다. 사회보험은 국가의 재정 부담과 책임을 가능한 한 최소화했고, 급여수급 자격을 보험료 납부 여부와 연결시킨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사회보험을 도입했으나, 보장 수준이 낮고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국가의 재정부담을 최소화한 것은 박정희 정권에서 이루어진 사회보장제도의 제도적 유산이다.


4.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못한 정치경제적 이유


1976년에 발표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보면, “경제개발계획을 통하여 공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으나 형평성과 질적 성장에 미흡하였다”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 스스로도 경제발전 과정에서 ‘복지 없는 성장’을 이룩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거론했던 도표〈의료부조 및 의료보험 적용 비율〉의 분석틀에 따라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못한 원인을 박정희 정권의 정책망, 정책아이디어, 비토점, 정책연계의 측면에서 논의해보자.


⑴ 정책망:국가-기업 연합관계


박정희 정권에서 국가는 노동을 배제한 상태에서 기업과의 연합관계를 주도적으로 형성했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기획원 설치를 비롯한 경제관료체계의 재정비와 국책은행 설립 등을 통해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을 위한 제도적 토대를 확립했다. 경제기획원은 정부예산을 포함한 경제정책 전반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여 정부 관료제 내에서 지배적 위상을 유지했고, 다양한 정책수단을 통해 견제정책에 대한 기업의 순응을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국가 제도적 토대 위에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고 기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양질의 값싼 노동인력을 제외하고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과 생산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지향 산업화전략을 추진했다. 농촌으로부터 대량 유입되는 비숙련 잉여노동 인력으로 인해 기업은 저임금 노동자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노동정책은 시장순응적(market-conforming) 성격을 지녔다. 또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냉전반공체제’의 특성은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 더 강화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운동이 성장하지 못했다. 최장집 고려대학교 교수가 설명하는 것처럼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사실상 계획의 수립과 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동원에서 ‘백지위임장’을 가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한 유신독재정부는 공생적 국가-기업 연합관계(Symboitic state-business alliance)를 굳건히 다져갔다. 공생적 국가-기업관계를 유지하며, 더 노골적으로 근로자들을 정치적으로 배제시켰으며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근로자들을 경제적으로 동원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분야에서 특정 산업과 투자 대상 기업을 선정한 후 금융 및 세제혜택, 관세장벽, 보조금 지급, 행정 및 비공식적 지원 등 다양한 정책수단을 통해 기업활동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며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중화학공업화는 포드주의 노동 과정에 기초한 대량생산체계를 확립했으며 대규모 공장의 출현과 함께 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꾸었고 노사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기업 내에서 노무관리가 강조되어 위계적 노동통제가 체계화되었고, 정부는 임금억제를 위해 노사관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억압적 노동통제 정책을 본격화했다.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은 대기업들을 재벌세력으로 변모시켰으며, 그 결과 공생적 국가-기업 연합관계에서 재벌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반면에 정책결정 과정에서 근로자들의 목소리는 지속적이며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국가-기업 간 연합관계라는 제도적 환경에서 사회복지정책은 기업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여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수출 주도형 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낮은 수준의 노동비용을 통해 비교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기업의 요구를 사회복지정책의 형성 과정에서 성실하게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한 여러 입법들이 이루어졌으나 기업의 노동비용 증대에 관한 우려로 집행이 연기되었으며,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 결과 근로자들은 탈상품화를 위한 제도를 전혀 갖추지 못하여 노동시장의 규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숙련기술인력이 부족해지자 기업들은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즉, 대기업을 중심으로 숙련기술인력의 확보 및 유지를 위해 사회보장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갔다. 기업의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박정희 정권은 1977년에 처음으로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유신독재정부에서 의료보험과 의효보호를 도입한 것은 정통성을 결여한 권위주의 정권이 정당성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의료 서비스 이용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것에 대한 대응이었고,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정치적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의료보험의 도입은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해 1970년대 중반 이후 기술인력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노동비용이 증가하기 시작했던 상황에서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대기업의 이해가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이미 많은 대기업들은 기업복지의 차원에서 종업원을 위한 의료비 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었고, 정부는 기업이 부담하는 의료보험료를 손비로 인정해 법인세 감면혜택을 제공했기 때문에 의료보험의 도입에 따른 기업의 추가적 비용부담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숙련기술인력의 이직에 따른 노동비용의 상승을 억제해야 하는 대기업들에게 의료보험제도는 기술인력을 유인 및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매력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의료보험은 정부와 대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 아래 도입되었으며, 의료보험의 관리운영 주체인 전국의료보험연합회를 대기업 연합체인 전경련에서 운영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형성기에서부터 대기업 중심 생산체제의 요구와 이해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복지정책은 국가-기업 간 연합관계라는 제도적 환경에서 추진되었고, 노동비용에 기초한 비교우위를 유지하려는 기업들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와 대기업 간의 긴밀한 협력 아래 대기업 중심 생산체제의 요구에 부합하는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했다. 그 결과, 사회보장제도는 발전하지 못했으며, 사회보험은 낮은 기여금과 낮은 급여수준을 결합하고 대기업 근로자들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⑵ 정책아이디어:발전주의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을 국가 목표의 최우선으로 삼는 발전주의를 지향했다.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빠른 성장률을 이루면서 발전주의는 자기 강화적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2년~66년)에 국내총생산이 연평균 8.5%, 제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1967~71년)에 11.4%를 기록하며 성장과 목표달성은 박정희 정권의 근본 철학이자 가치가 되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취약한 정당성을 극복하고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해 산업화를 통한 고도성장과 자립경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정책아이디어는 경제에 대한 사회복지의 종속적 성격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선성장, 후분배’·‘성장을 통한 복지’·‘낙루효과(trickle-down effect)’ 등이 사회복지와 관련한 대표적인 정책아이디어였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유지해온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대통령의 정책아이디어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특히 정책의제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럼 대통령의 신년사를 비롯한 주요 연설문과 전기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의 사회복지에 대한 정책아이디어를 살펴보자.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 의장은 쿠데타 이후 보였던 사회복지에 대한 표면적 관심이 크게 줄었다. 1964년 신년사에서는 물라고와 시급한 경제발전을 위해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합리적으로 꾸준히 추진해나갈 것을 밝히며,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근면한 생활인의 자세를 강조했다.


“근면한 생활인의 자세를 살려가는 한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노력과 분발은 반드시 그리고 하루 속히 결실을 맺을 것을 나는 확신에 마지 않습니다. 각자의 생활분야에 땀 흘려 일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착실히 하나씩 쌓아 올라갑시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은 고용을 통한 복지로 옮겨 갔다. 실업자와 영세민을 위한 대책으로 일을 통한 자활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1964년에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재원으로 실업자와 영세민을 위한 자조근로사업이 진행되었다.


“지금 우리는 국정의 기틀도 잡혀 2년째 접어들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도 마지막 박차를 가해야 할 제4차년도에 들어서,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 할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올해의 삼대목표를 ‘증산’·‘수출’·‘건설’로 정하였습니다. (중략) 사회복지정책에 있어서는 고용확대를 통한 사회안정에 중점을 두고 실업자와 영세민에 대한 합리적인 자활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입니다.”


수출주도형 경공업 발전 전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19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사에서는 경제개발계획·경제성장·수출증대·조국 근대화·자립경제 등이 중심 내용이 되었고, 사회복지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65년 대통령 신년사에서부터 용어 자체가 실종되었던 사회복지는 1972년 신년사에서 다시 등장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오직 변하지 않고 있는 북괴와 대결하여 우리가 새해에 들어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북괴의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고, 이 땅 위에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며, 평화로운 가운데 높은 경제성장을 계속하여 우리 모두가 땀 흘려 일한 만큼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복지사회의 기틀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1962년 지시 각서에서 ‘복지국가를 조속히 이룩함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는 내용은 1972년 신년사에서 복지사회가 궁극적 목표라고 바뀌어 등장하고 있다. 복지사회와 복지국가는 복지에 대한 주요 책임을 국가가 맡느냐를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이 두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복지국가와 복지사회를 혼용해 사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에서 “모든 국민이 땀 흘려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근검, 협동하는 생활 기풍을 더욱 함양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1980년대에 우리가 맞이하게 될 풍요로운 복지사회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정도라고 믿습니다”라고 했지만, 며칠 후 열린 연두기자회견에서는 다음과 같이 복지국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경제개발 또는 국력배양의 궁극적 목적은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있는 것이며, 도시와 농촌에 많은 일터를 만들어 국민에게 일만 하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한 것이다. (중략)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복지국가는 결코 일조일석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10월 유신을 여러 측면에서 풀이했는데 종합해서 한마디로 설명하면 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려 열심히 일해서 복지국가를 만들어 번영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적 추진과 고도성장에 힘입어 유신독재정부가 안정화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언급은 다시 사라졌다. 그런데,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은 일자리 증가를 통해 빈곤을 감소시켰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다. 특히, 수출 지향 산업화를 통한 실업자 감소가 한계에 도달하고 정부의 재분배정책에 대한 무관심이 지속되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경제발전과 함께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년~1982년)에서는 기존의 경제개발계획과는 달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사회발전 목표가 경제개발계획에 포함되었다. “한국은 공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으나 형평과 질적 성장이 미흡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구조개선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정책기조로 전환하여 성장·형평·능률을 기본이념으로 발전계획을 수립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1978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에 다시 사회복지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 복지사회 건설이 궁극적 목표라고 밝히고 있다.


“수출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중화학공업은 지난 한 해 동안에 크게 확충되었으며,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됨으로써 우리나라도 마침내 원자력 시대의 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략) 지금 우리는 민족중흥의 중간 목표인 번영된 복지사회 건설에 또 한 발짝 다가섰습니다.”


“각계각층의 국민 모두가 한 사람도 뒤지는 일 없이 국가 건설에 기꺼이 참여하고 다 함께 땀 흘려 일하는 데서 시대적 사명을 느끼고 보람을 찾아 풍요한 고도산업 사회 속에 인정과 의리가 넘치는 복지사회를 기필코 건설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정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보장제도가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은 변함이 없었다. 사회복지가 근로자들의 복지의존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여전히 사회보장제도 설계에서 가장 우선하여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에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의 소득이전정책 혹은 복지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무시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경우 복지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떨어뜨린다. 복지정책이 그 목적과 반대로 게으름과 의존 심리를 키운다면, 경제성장은 물론 개인의 복지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은 정책결정 과정에서 발전주의가 근본 철학이자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고, 사회복지와 관련하여 선성장-후분배·성장을 통한 복지·낙루효과·복지의존 등이 지배적인 정책아이디어였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사회복지가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려서는 안 되며,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복지사회의 단계적 건설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정책아이디어의 영향으로 사회복지를 위한 국가의 재정 부담을 가능한 한 최소화했고, 개인의 욕구가 아니라 보험료를 부담할 능력이 있는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회보험제도가 선호되었으며, 고용을 통한 복지를 강조하게 되었다.


⑶ 비토점과 정책연계:경제기획원의 비토권과 성장우선정책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기업들의 요구는 경제정책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의 발달 과정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추진된 수출 주도형 산업화와 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기업들은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렴한 노동비용과 낮은 조세부담률을 필요로 했다. 조세수입이 낮은 경우에 정부는 소득 재분배와 사회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경제개발 기간 동안 사회복지와 관련돤 여러 입법들이 이루어졌으나 기업의 노동비용 상승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집행이 연기되었으며,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회보험에서도 기업의 노동비용에 대한 우려에서 낮은 수준의 보험료와 낮은 수준의 급여를 연결하는 사회보험체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정책조정을 둘러싼 부처 간 관계, 특히 경제기획원의 지배적 지위 및 보건사회부의 상대적 미약성 등은 경제정책과 사회복지정책 간의 정책연계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토대가 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도입 과정에서 국가의 재정부담을 필요로 하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도입에 대해 비토점으로 작용해왔다. 1963년 의료보험법 제정 과정에서 초기의 강제가입 원칙을 포기하고 자발적 가입 원칙을 택한 것이나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의 제정 과정에서 경제기획원이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내자동원의 수단으로 삼기 위해 20년 기금적립방식을 택한 것이나 1977년 의료보험의 도입에서 국가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가 행정비용만을 부담하도록 한 것 등은 사회보장제도의 도입 과정에서 경제기획원이 비토점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된 수출 주도형 산업화와 중화학공업화 정책은 기업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저렴한 노동비용과 낮은 조세부담률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낮은 수준의 기여금과 낮은 수준의 급여를 조합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소득유지 체계를 꾸리게 되었으며, 정부예산을 재원으로 하는 공공부조가 최소화되고 사회 서비스 부문이 발전하지 못했다. 아울러, 경제기획원이 사회복지정책 과정에서 비토점 역할을 수행하여 선성장-후분배 논리를 관철하고자 노력해왔고, 사회복지정책은 이러한 제도적 한계 내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복지국가 혹은 복지사회의 건설이 궁극적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이는 실효성을 지니지 못한 정치적 수사에 그치고 말았다.


5. 말 그대로 꿈으로 끝난 복지국가 건설


비민주적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박정희 정권에서 복지정책의 실종은 사회복지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이와 함께, 사회복지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가-기업 간 연합 정책망 위에 기업의 이해만 받아들이고 노동자들의 이해는 배제한 점, 발전주의 이데올로기에 압도된 사회복지 개념과 성장 중심의 불균형 경제정책에 종속된 사회복지정책 등은 사회복지가 발전하지 못하도록 한 주요 요인들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아버지의 궁극적 꿈은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는 박근혜 국회의원의 말은 대통령의 연설문과 공식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동안 복지국가는 말 그대로 ‘꿈’에 그쳤고,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에 종속되어 ‘복지 없는 성장’을 가져왔을 뿐이다.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소득의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국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귀속되었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노동시장을 떠나서는 자신의 복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품화된 사회였다. 박근혜 국회의원이 복지국가 건설이 아버지의 궁극적 꿈이라고 언급하면서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려면 ‘복지 없는 성장’을 초래했던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 발전주의 국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적 정치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합의주의 정책결정, 경제성장과 복지의 동반성장이 가능한 발전전략, 복지 친화적 경제정책 등이 필요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고,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화의 진전을 이룩했다. 민주화는 시민들의 기본권 강화, 더 나아가서 사회권(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보장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켰다.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시민들의 기본적 생존권과 삶의 질을 희생시키며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산업화의 성공,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을 이루는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복지국가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 재원조달을 위한 증세와 시장 기구에 대한 적절한 규제 등은 피할 수 없다.


최근 박근혜 국회의원은 생애주기별 맞춤복지, 한국형 복지국가를 내세우며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고 있다.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 박근혜 국회의원이 발전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를 핵심 공약으로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사회문제에 대한 박근혜 국회의원의 인식과 대응의 변화가 다행스럽다.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푸는 경우 복지국가 건설의 꿈은 박정희 정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꿈’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박정희의 맨얼굴" 중 (2012년 8월 20일 초판 5쇄 발행. 유종일 엮음. (주)참언론 시사IN북)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community/mainView.php?table=byple_bbs&uid=2664 




닉네임  비밀번호  139302  (스팸등록방지:빨간숫자만입력)

12342 [분석과 전망] 불발탄이 된 조미정상회...
8892 ‘맥스선더’에 내린 조선의 철퇴
8840 이건 아니지 않은가 - 문재인 대통령에...
8688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문
7408 미국은 세계평화를 원하는가?
6911 대한민국 보수의 최대 公敵 - 전우용
6039 [오영수 시]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가
5727 기레기와 ‘전문가’ 들에게 경고한다
5359 안철수 유승민 송파을 공천으로 또 충...
5157 [천안함] 후타실 CCTV 영상이 조작이라...
                                                 
[여인철의 음악카페] 김희숙 여사...
                                                 
김상조 면박한 <진보적 지식인&...
                                                 
미·소 군정기의 민중들의 삶은 살...
                                                 
6.12 조미회담과 6.13 선거를 예측...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트럼프-푸틴 정상회담, 북핵·핵무...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
                                                 
[천안함] 후타실 CCTV 영상이 조작...
                                                 
대한항공의 성장, ‘관피아’의 전...
                                                 
차기 민주당 대표, 김부겸 행자부...
                                                 
삭제된 오보를 포털에 다시 올린 ...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대(代) 이은...
                                                 
존경하는 뉴욕타임즈 귀하!
                                                 
[이정랑의 고전소통] 남우충수(濫&...
                                                 
유권자, 즉 국민이 ‘단일화’를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
                                                 
“근혜를 보면 그 아부지를 생각한...
                                                 
[오영수 시]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3 진미파라곤930호 (주)민진미디어 | 발행.편집:신상철 | 등록번호: 서울 아01961 | 발행일: 2012.02.15 |
이메일: poweroftruth@daum.net | 사업자번호: 107-87-60009 | 대표전화: 02-761-1678 | 팩스: 02-6442-0472 | 통신판매: 2012-서울영등포-0188호
회사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고/사업제휴문의 | 기사제보 | 칼럼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