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 CMS후원
2018.10.21 16:52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세계  |  미디어  |  칼럼  |  서팡게시판  |  여행게시판
 
칼럼홈 > 김갑수

코리아전쟁 종전선언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②
전황의 재역전, 서울을 버린 중국군
김갑수 | 2018-06-05 16:31:4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6.12 싱가포르 조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코리아 전쟁의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미 대통령 트럼프의 입에서 나올 정도라면, 이제 종전선언은 시간문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미 3자가 참여하는 종전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코리아전쟁 종전은 남북미 3자 외에 반드시 중국이 참여해야 온전해집니다.

또한 ‘남한 정부는 1953. 7.27 휴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종전선언 참여의 자격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관점입니다. 종전선언은 실제 전쟁에 참여한 주체가 하면 되는 겁니다. 코리아 전쟁의 참여 주체는 명백히 남북미중 4자였습니다.

종전선언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이것이 어떤 역사적 인과관계를 갖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선언이 가지는 중차대한 역사적 의의를 실감해 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1953년 7.27 휴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다만 기술 편의상 논의의 출발을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부터로 하겠습니다. 3편에 나누어 게재 합니다- 필자 주

▲사진출처: 연합뉴스

전황의 재역전, 서울을 버린 중국군

1951년 봄, 미국과 국군의 반격으로 전황은 또다시 반전되었다. 중국군은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중국군은 네 차례에 걸친 대공세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보급도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중국군은 3차에 걸친 대공세로 미군을 37도 선까지 밀어냈지만 4차 공세에서는 실패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군 공격 부대는 단일 지휘 체제가 아닌 각 군단에서 차출된 사단들로 급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공격은 일사불란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부대별로 소수병력을 투입해 반복 공격하는 수법이었다. 이는 갑작스러운 조중연합군 편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군이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은 원주 부근의 지평리 전투에서였다. 야간에 횃불을 들고 공격하는 중국군의 루트를 미리 예상한 미군은 지평리의 협소한 지형에 중국군의 주력부대가 이르렀을 때, 집중시켜 놓았던 화력을 일시에 쏟아 부었다. 중국군은 5,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퇴각했다.

적에게 부대 정비의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즉각적인 반격 작전에 돌입했다. 그는 중국군이 대공세로 전선을 돌파한 후 결정적인 시점에 공세를 멈췄던 이유, 그리고 다음 공세까지 1개월의 터울이 있는 이유를 알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군의 보급체계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군 전투병은 언제나 1주일 분의 탄약과 식량밖에는 휴대하지 못한다. 그들의 보급품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공격하면 그들은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공격만이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비법이다.”

맥아더는 서울 조기 탈환의 방침을 굳혔다. 그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미군이 한강 남쪽에 도달한 것은 1951년 2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리고 미군은 한 달 가까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군과 대치했다. 미군은 월등한 전투력을 확보한 후 공격하여 중국군 스스로 서울을 내주도록 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었다.

이런 판단에 따라 미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서울 외곽의 요로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서울을 고립시키는 이른바 절단 작전을 진행시켰다. 3월 들어 미군이 전면적인 서울 탈환 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마침내 중국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군이 서울에서 빠져 나갔음을 확인한 미8군 사령관은 수륙 양용차를 이용하여 한강도하작전을 벌였다. 중국군의 반격도 없었고 시가전도 벌어지지 않았다. 인천상륙 후 서울 탈환 때에 벌어진 치열한 시가전 양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9.28 수복 때와 같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지 않았다. 수도의 기능은 여전히 부산에서 행사되고 있었다. 1951년 3월 17일 방한한 맥아더도 서울에 들르지 않고 춘천 1해병사단을 순시한 후 동경으로 되돌아갔다.

점령군이 네 번씩이나 교차된 서울은 폐허였고 주민들의 정신은 공황 상태였다. 교통, 통신 등의 기간시설은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주민 식량도 턱없이 모자라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는 불과 20만의 인구가 남아 있었다. 전체 인구의 85% 이상이 서울을 버린 셈이었다. 이것은 인민공화국의 시절이 얼마나 괴로웠으며, 그 후 귀환한 대한민국의 서슬이 얼마나 파랬는지를 알려 주는 수치이기도 했다.


맥아더 해임, 미중은 왜 휴전을 하기로 했을까

1951년 4월 11일 정오, 일본 라디오 방송은 워싱턴 발 기사로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맥아더의 해임은 중국군의 개입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특히 1951년 3월 미군이 재차 38선을 압박하게 되자, 맥아더는 호전적인 전쟁 계획을 세상에 알렸고 이를 접한 백악관은 그의 행동을 월권과 전횡이라고 간주했다.

맥아더는 또다시 38선을 넘어 진격하겠다는 의사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공화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맥아더는 전쟁의 완승을 원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이상 38선은 무의미하며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역시 유엔군이 38선에서 정지해서는 안 되며 조중 국경선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 주일연합군사령관, 극동미군사령관 등의 일체 보직을 박탈당했다.

미군이 다시 38선을 넘을 것인지의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중국과 교역을 희망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38선 돌파에 반대하는 입장을 일단 취했다. 당시 워싱턴 수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들은 중국이 본격 개입한 이상 압록강까지 진출한다고 해도 전쟁은 종료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합쳐 1,200km에 달하는 국경선에서 중국과 소련의 대군과 대치하게 되는 일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현저히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극동의 작은 나라에 국운을 걸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지지부진하며 계속되었다. 개성에서 시작한 정전협정이 판문점이라는 곳으로 옮겨 진행된다고 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하게 땅 빼먹기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전선은 이미 38선 근방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미군과 중국군의 암묵적 합의 같은 것이었다. 양쪽 모두 큰 실패를 경험한 터라 어느 쪽도 전선을 치고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 중국군은 미군의 화력과 공군력을 두려워했다. 미군은 중국군의 겨울 공세에 세 차례나 당한 패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계속>

코리아전쟁 종선선언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 ①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592 









      



모바일 기기에서도 댓글 작성이 가능하도록 보완하였습니다. (현재 아이폰 기기까지 테스트 완료하였습니다.)


닉네임  비밀번호  049529  (스팸등록방지:빨간숫자만입력)

                                                 
민바행 (민족문제연구소바로세우기...
                                                 
토사구팽 확실 김성태동지의 必死 ...
                                                 
문화에 담겨 있는 이데올로기 아세...
                                                 
6.12 조미회담과 6.13 선거를 예측...
                                                 
왜 당신은 계란을 바위에 던지시나...
                                                 
공기업 적자, 정치인-자본-관료의 ...
                                                 
美 국무부, 3차 남북정상회담에 “...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④
                                                 
대한항공의 성장, ‘관피아’의 전...
                                                 
국토부 항공정책실 공무원 34.5%, ...
                                                 
KBS의 민주당 돈봉투 오보
                                                 
천안함의 진실을 지킨 사람들과 박...
                                                 
“1970년 이전 독립유공자만 조사...
                                                 
전성기
                                                 
[이정랑의 고전소통] 형벌독려(刑...
                                                 
유권자, 즉 국민이 ‘단일화’를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기자회견...
                                                 
“근혜를 보면 그 아부지를 생각한...
                                                 
[오영수 시] 3.1절, 제헌절, 광복...
5312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①
4078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을 찾습...
3181 천안함 ‘1번 어뢰’ 에 감긴 철사...
2834 손석희 앵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
2713 기자들이 비웃었던 문재인 대통령...
2073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②
2061 친문계, 김진표 대표-전해철 사무...
2006 친위쿠데타 의심됐던 소름 돋는 그...
1844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시킬 수도 ...
1715 천안함 ‘좌초’에 대하여 ③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3 진미파라곤930호 (주)민진미디어 | 발행.편집:신상철 | 등록번호: 서울 아01961 | 발행일: 2012.02.15 |
이메일: poweroftruth@daum.net | 사업자번호: 107-87-60009 | 대표전화: 02-761-1678 | 팩스: 02-6442-0472 | 통신판매: 2012-서울영등포-0188호
회사소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고/사업제휴문의 | 기사제보 | 칼럼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