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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1
우리 역사에서 일류국가 아닌 때는 20세기 100년뿐
김갑수 | 2018-01-29 14:21:4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역사 속의 우리 민족과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의외로 우리 민족과 오랜 역사적 교류를 이어온 곳이다. 일찍이 우리의 고조선 문명은 중앙아시아까지를 포괄하여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훨씬 앞선 홍산문명을 구축했다는 가설이 각종 신화와 전설 그리고 수없이 발견되고 있는 유물 등에 힘입어 갈수록 정설에 근접하는 역사적 사실로 부상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에는 우즈벡 사람이 나오고 우즈벡 벽화에는 고구려 사람이 나온다. 신라의 향가 <처용가>와 고려의 속요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은 중앙아시아 사람임이 분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회회인(回回人)이 10여 차례 등장하는데 이들이 곧 중앙아시아인이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 온 서구 중심의 세계사는 최초의 세계화가 16세기 유럽의 근대체제에서 시작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철저히 유럽 중심의 사관이 만들어낸 조작에 가까운 세계사관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란 서로 다른 문명과 지역에 속하는 나라들이 각기 단절, 고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문화와 물자 등을 교류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 강대국들은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자국 중심의 이익만을 추구해 왔다. 이런 역사에 가장 크게 희생된 지역이 중앙아시아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중앙’이란 아시아의 중앙이 아니라 유라시아의 중앙이란 뜻이다. 유라시아의 정 중앙에 위치한 네 나라를 든다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다. 이 네 나라는 중국과 인도와 유럽 삼각형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볼 때 유럽은 사실상 유라시아 대륙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변방지역이 되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16세기 유럽의 근대체제가 성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여러 지역의 문명들이 역동적인 교류를 통해 무역관계를 형성하면서 비교적 평화적인 세계화를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문명 소통의 연결 통로가 바로 실크로드였다.

실크로드는 크게 보아 오아시스길, 초원길, 바닷길 등 세 갈래 코스가 있었는데 이 모두가 중앙아시아를 관통하거나 근접되어 있다. 요컨대 중앙아시아는 유럽 근대체제 이전 유라시아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주요 매개 지역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실크로드라 하면 기원 전 8~7세기 스키타이의 초원길 개척, 기원 전후 한나라 장건의 서역로 개척과 로마인의 동방 개척, 기원 후 중국의 비단이 전파되던 당나라 – 이슬람 제국의 교류가 이루어진 길을 말하는데, 이 길은 몽골제국 시대를 지나 18세기까지의 유구한 역사 동안 동서문명의 교류를 역동적으로 일궈 낸 주요 동선이었다. 한편 한반도는 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이었다.

[패권국가의 출현, 평화 해치고 문명교류 단절시켜]

8세기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인들은 유라시아 문명 교류의 중심자로서 그 위상이 아주 높았다. 그런데 8세기 중엽 당나라에서 일어난 안록산의 난은 소그드인의 위상을 위축시켰다. 안록산은 소그드인 부친과 돌궐족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대교역상이었다. 이에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면서 소그드인을 대규모로 숙정했다. 결과 소그드인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동서문명의 교류는 침체되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문명교류는 강대국이 패권을 행사하게 되면 갑자기 축소되거나 단절되어 온 것이 유라시아의 역사이다. 일찍이 중앙아시아에 지역 패권을 행사한 강대국은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 등이었다. 거대 제국 몽골은 절대적인 패권국가였지만 의외로 모든 문명과 종교에 개방적이고 관용적이어서 역사가들은 몽골로 인한 문명교류의 제약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18,9세기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20세기 미국 – 소련의 냉전체제는 중앙아시아를 통한 동서문명의 교류를 결정적으로 침체시켰다. 아직도 중앙아시아의 남쪽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은 동서냉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대국들의 패권 야심이 커질수록 국가간 상호 수혜의 원칙이 손상되면서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에 빠져들어야 했다. 중앙아시아는 중국과 유럽의 틈바구니에서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감수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 각국은 옛 실크로드의 위상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이고 있다. 이에 따라 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이었던 한국과의 교류도 대폭 활성화되었다. 이런 역할의 중심에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30만 이상의 고려인이 있다.

이런 추세는 21세기의 다극체제와 더불어 더욱 발전할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여러 도로와 철도들이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면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른바 ‘신 실크로드’ 시대가 다시 열리고 있다. 머잖아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은 거대한 단일시장과 공동생활권으로 변모할 것이다.

유라시아의 공동생활권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중앙아이아를 거쳐 모스크바, 페데르스부르크, 스칸디나비아, 알프스. 이베리아 반도까지 단 번에 내달릴 수 있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간구한다. (박상남, 나탈리아 카리모마 공저 《역사 속의 한국과 중앙아시아》)

[21세기의 실크로드]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천명하는 바로 그 시점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에 지대한 관심과 실질적인 접촉을 진행해 왔다. 애당초 일대일로라는 개념 자체가 중국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을 잇는 육상 실크로드(一帶)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닿는 해상 실크로드(一路)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여기서 카자흐스탄은 핵심지역으로 언급된다.

러시아 역시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진행하면서 중앙시아 지역에 전개했던 기지는 현재 모두 폐쇄되고 미군이 철수해야 했던 것에 비해,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여전히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했던 국가답게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유라시아경제연합(EEU), 그리고 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장치를 통해 이 지역에서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상하이협력기구(SCO)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회원국들이 대부분 중앙아시아 국가들이며, 이는 중러 양국이 중앙아시아에 두고 있는 전략적 관심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중심에 현재 카자흐스탄이 있다.

옛 종주국 러시아로선 중국의 서진(西進)을 방관할 수만은 없다. 러시아는 카자흐스탄·벨라루스와 함께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출범시키고 관세동맹을 맺어 앞마당 지키기에 나섰다. 거기에 더해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유사시 안보를 책임질 나라는 결국 러시아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결국 카자흐스탄은 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면서 균형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카자흐스탄의 기본전략은 안보협력은 러시아와, 경제협력은 중국과 진행하는 것인데, 러시아를 미국으로 바꾸면 한국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많은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의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한 영국과 러시아의 각축전이었다.

지금 펼쳐지는 ‘뉴 그레이트 게임’은 중국이 가세했다는 게 달라진 양상이다. 푸틴의 러시아와 시진핑의 중국은 현재 미국이 주춤하는 사이 세계 각지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양국 사이에 끼어있는 중앙아시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티무르 제국 이후의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 이후의 중앙아시아는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장 큰 원인은 유목민이 갖고 있던 군사적 우월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주변 지역들이 화기로 무장한 보병 군단의 도입을 추진하는 와중에도 중앙아시아에서는 기마 군단을 중심으로 한 군대 편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유지되었다. (티무르 제국 이후에 초원과 위구르 일대를 지배한 준가르 제국은 낙타에 대포를 장착하거나 조총을 도입하여 부분적으로 화기를 도입했으나 주력은 여전히 기병 공격이었다) .

따라서 군사력은 주변 강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하되었으며 단일하면서 강력한 군사적 보호가 부재한 지역사회는 몽골 군단의 치명적인 개인주의(계승분쟁)로 서로 분열되어 역동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서북으로부터는 러시아가 별다른 저항 없이 준가르 제국의 영역까지 동진을 해왔다. 반면에 중국은 끊임없이 청나라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준가르 제국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면서 서쪽으로 군사적 진출을 모색했다.

중앙아시아는 18~19세기에 동으로부터 청나라(중국), 서북으로부터 로마노프 왕가 등의 양면적 압력에 노출되었다. 그러다가 이들 제국의 군사력에 굴복하면서 독자적인 세계로서의 자립성을 잃고 식민지화했으며 두 제국의 ‘주변’으로 전락해간다.

청나라는 중국 전역, (동)몽골, 티베트로 영토를 차례로 확장한 후 18세기 중엽에 동투르키스탄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하던 준가르 제국(서몽골)의 계승분쟁을 틈타 멸망시켰다. 1758년에는 타림 분지 전을 점령하여 이틈해인 1759년에 동 투르키스탄을 청나라의 새로운 영토로 병합했다.

새로 얻은 땅을 의미하는 ‘신강新彊’은 1870년 코칸드 칸국(우즈벡 동부)의 용병이던 야쿱 벡이 정권을 탈취하여 일시적으로 무슬림 정권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878년 청나라는 이를 재정복하고 1884년에 신강성을 설치했다.

한편 러시아는 코카서스와 시베리아 정복을 완료하자 진로를 남으로 바꾸어 중앙아시아 정복에 착수했다. 용병 집단 코사크를 앞세운 러시아가 야금야금 카자흐 초원 북변에 다다를 즈음, 카자흐는 이미 칸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당시 카자흐는 소쥐즈, 중쥐즈, 대쥐즈의 유목민 부족연합체로 나뉘어 있었는데 동남쪽의 준가르 제국이 흥기하여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준가르 제국의 공세에 맞서 러시아의 군사력에 기대어 안전을 도모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 사이 러시아는 카자흐 초원에 하나 둘씩 요새를 세우면서 군사적 방어와 통상의 거점이 되는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 결과 소쥐즈와 중쥐즈는 1820년에 러시아에 병합한 뒤에 1847년에는 대쥐즈 마저도 병탄했다. 이로서 카자흐 초원도 러시아에 복속되었다. 이후 1891년부터 카자흐 초원은 옴스크 소재 초원(스텝) 총독부의 관할 아래 놓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남부의 정주민 지역으로 진출한다. 이 지역에는 우즈베크 계열의 세 한(汗)국이 있었는데, 중앙에는 부하라 아미르 국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히바 칸국, 동쪽에는 코간드 칸국이 있었다.

러시아는 우선 코칸드 칸국 공략에 착수하여 1865년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상업 도시 타슈켄트를 첨령하고 1867년 이곳에 투르키스탄 총독부를 설치하여 중앙아시아 남부 지역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이어서 부하라 아미르 국과 히바 칸국으로 진격하여 주요 도시인 사마르칸트와 히바를 점령했다. 부하라와 히바 두 칸국은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고 코칸드 칸국은 1876년에 멸망했다. 그리고 1881년에 러시아는 유목 투르크멘에 대한 괴크테페 전투에서 승라하여 투르크메니스탄 일대까지 석권하였다.(대폭 참조: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교통과 소통의 도시 아스타나]

유라시아 물류시장의 서쪽 종착지가 서유럽이고 동쪽 출발지가 한국이라면, 카자흐스탄은 물류 운송로의 가운데에 위치한 나라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는 고려인 극장이 있는 ‘알마티Алматы’라는 도시였다. 천산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 싼 알마티는 전통적으로 인구도 가장 많고, 경제의 중심지이지만 상대적으로 카자흐스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다. 반면에 ‘아스타나’는 북북 철로의 교차지로서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아스타나’는 러시아가 1824년 카자흐스탄을 침략하면서 만든 군사 요새가 그 기원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카자흐 지배 중심지가 되었으며, 20세기 초 철도의 교차점이 되면서 도시 규모가 커졌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북부 지방의 개발을 촉진시키는 한편 북부 지방에 많이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97년 정식으로 천도하면서 도시 명칭을 카자흐어로 수도(首都)라는 뜻의 ‘아스타나’로 고쳤다.

아스타나는 중국횡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연결하는 요충지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스타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2013년 9월 ‘일대일로’ 구상을 발표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시리아 전쟁의 종결을 위한 평화협상이 열린 곳도 ‘아스타나’였다. 시리아 전쟁은 이란과 사우디의 지역 강대국을 비롯해서 미국과 러시아 등 세계 강대국이 모두 개입한 준 세계대전이었다. 따라서 언뜻 ‘내전’의 양상을 띤듯하나 실상은 지역 및 세계 강대국들의 대리전에 가까운 시리아 전쟁은 복합적이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국제 전쟁이다.

유라시아에 대한 영미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시대였다면 시리아 전쟁 종결을 위한 평화협상의 장소는 아마도 파리나 제네바 또는 워싱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라시아 지역 전쟁에 강력히 개입한 러시아와 터키, 이란, 중국의 달라진 위상이 교통과 소통의 공간이었던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가치를 복원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카자흐스탄 ‘아스타나’는 유메리카(영미)적 질서에서 유라시아적 질서로 이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지배의 실상, 제국이 가져온 ‘근대’와 ‘모순’]

“우리는 유럽에서 타타르인 취급을 받지만, 아시아에서는 우리도 유럽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사적인 측면에서 ‘킵차크 칸국’을 계승했다고도 볼 수 있는 러시아제국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타타르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서유럽과 가까운 러시아는 다른 몽골계 국가들과 달리 중화기 중심의 유럽식 보병 군단체제를 일찍 받아들여 식민지 확보에 부심했다.

바다를 통한 식민지 확보가 쉽지 않았던 러시아에게 중앙아시아는 바다와 인도에 다다를 수 있는 길목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식민지 인도와 가까워지는 러시아를 견제하면서 영국도 중앙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했다. 그 결과 19세기말 조선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러한 전략적인 관심 외에도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통치가 가져온 서구적 근대의 실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러시아는 중세적인 이슬람 인습에 사로잡혀 전제군주의 전횡아래 중앙아시아 주민들이 무지 속에 신음하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곳에 러시아적인 질서를 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 지역 사람들을 ‘계몽’시키고 ‘해방’시키며 ‘선량한 러시아 신민’으로서 ‘근대적’인 유럽 문명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중앙아시아 정복의 대의(大義)로 내세웠다.

하지만 실리적인 측면에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러시아 농민을 이주시켜 러시아의 경작지 부족을 보충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재배되는 면화를 러시아 면화 공업의 원료로 이용하는 데 높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령 오렌부르크의 초원(스텝) 총독부에서는 내부무 관할의 민정(民政), 타슈켄트 투르키스탄 총독부에서는 육군부 관할의 군정(軍政)이 이루어졌다. 치안과 징세에 중점을 두었으며 무슬림 사회의 전통 제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러시아어 습득은 장려했지만 시베리아의 원주민에게 했던 것처럼 러시아 정교도로 집단 개종시키는 등의 강제적 동화정책은 실시하지 못했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근대화’의 요인으로 ‘공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공교육 보급’ 등을 꼽는다면, 중앙아시아에서는 러시아 제국을 통해 ‘서구적 근대’가 이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식민 통치는 여러 모순을 낳았다. 러시아 농민의 이주 정책으로 종종 선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유목민의 전통적인 유목 경로가 차단되기도 했다. 면화 생산의 확대로 자체 식량 생산이 줄고 아랄 해로 흘러드는 수원(水原)이 급감했다. 기근의 피해도 날로 심각했다.

식민지에 이주한 러시아인들은 대개 현지인들의 문화와 관습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했다. 현지인을 직접 대하는 하급 관리들의 횡포와 부패도 극성이었다. 이에 반발한 현지인의 시위나 항의는 철저하게 폭력으로 진압했다. 러시아제국의 식민통치에는 강압과 타협이 공존했으나 전반적인 통치 능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5개국들의 국경과 민족구성은 모두 소비에트 시기의 유산이다. 달리 말하면 소비에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나치아)’과 ‘민족 국가’가 소비에트 지배기를 거치면서 생겨나고 비역사적인 국경선을 갖게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러시아 내전이 격렬해지자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도 적군과 백군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범 투르크 민족주의를 지향하지만 자디즘에 반대했던 ‘바스마치’ 운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민족문제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적군 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한 배를 탄 볼셰비키와 무슬림 혁명가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소련 성립 후에 그들 사이의 결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계급과 민족, 양자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문제를 두고 양측에는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922년 사막과 산악지대에서 소비에트 체제에 무력 저항하던 백계(白係) ‘바스마치 운동’세력이 소멸했다. 소련 중앙은 1922년을 기점으로 투르키스탄과 부하라, 히바 등지의 공산당에서는 무슬림 구세대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하고, 중앙에 충성하는 러시아인과 현지의 프롤레타리아 출신 간부들로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1924년에 열린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은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이때부터 독소 전쟁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무슬림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졌다. 또한 1924년 전당대회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 단일한 투르크 무슬림 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소위 민족분할정책이 결정됐다.

이에 따라 1924년에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 만들어지고, 1929년에는 타지키스탄이, 1936년에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성립되었으며, 1937년에는 각 사회주의 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드디어 중앙아시아 지역의 분할 작업이 완료되었다.

소비에트 ‘민족분할정책’에 따라 투르크-무슬림 사회의 ‘부족’적 차이는 민족의 차이로 바뀌었고, 서로 다른 투르크 방언이 이제는 독자적인 언어로 인정받게 되었다. 더구나 투르크인들의 내적 결속을 방해하고 견제하기 위해 투르크어를 할 줄 알지만 동부 이란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타지크 인들을 별도로 독립시켜 공화국으로 만든 것은 전략적인 분할을 통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단위 국경 획정은 다민족 사회이면서 투르크-이슬람 전통을 가진 중앙아시아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러시아가 ‘투르키스탄’이라고 통칭했던 중앙아시아 전체 통합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투르키스탄’이라는 종래의 명칭은 사라지고 소련 내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이라고 불리었다. 이것이 오늘날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원형이다.


우리 역사에서 일류국가 아닌 때는 20세기 100년뿐

일본인 학자 미야지마 히로시(1948~ , 도쿄대, 동양사학)가 1989년 조선(북)의 중앙역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박물관 여성 안내원에게 전시물의 양이 고려시대보다 조선시대가 적은 이유를 물었다.

안내원은 조선시대는 유교가 지배했으므로 현재의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동행한 주체과학연구원의 K씨가 안내원의 설명을 듣다못해 유교에도 이로운 점이 있다며 유교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박물관의 여성 안내원과 주체과학연구원의 K씨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미야지마 히로시 저, 《양반》 중에서)

이 일화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조선의 박물관 여성 안내원과 주체과학연구원 직원의 역사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또한 1989년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다. 아마 지금쯤은 유학에 대한 조선(북)의 관점은 대폭 좋아졌을 것이다. 이처럼 역사에 대한 관점, 즉 사관은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관은 없다. 비교적 사상의 폭이 단순한 조선(북) 사회 내에서도 이렇게 다른데 하물며 북과 남의 사관은 더욱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 내에서도 자주와 모양, 진보와 보수에 따라 사관은 크게 다르다. 이런 면에서 나는 ‘모든 사관은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본다.

나는 제도권 사관에서 주로 현대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나는 운동권 사관에서 조선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두 권의 역사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와 《교과서 밖으로 나온 한국사》는 둘 다 제도권 역사서에 속한다. 그리고 전자는 한국 통사이고 후자는 한국 근현대사이다. 내가 두 권을 제시한 것은 후자가 전자를 보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고 이 책들을 읽어주기 바란다.

이북은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고구려를 정통으로 본다. 반면 이남은 신라를 정통으로 본다. 성깔(?)로는 고구려가 마음에 드는 것은 사실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제국 수‧당과 맞서 싸우면서 자주권을 지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훗날 남하정책을 실시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는 힘을 비축하여 백제, 고구려와 싸우다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인 점, 우리 역사의 강역을 평양 – 원산 이남으로 축소시킨 점이 비판 받는다. 하지만 이만큼의 성과도 제국 당나라와 최종적으로 10년 동안이나 투쟁해서 이룬 성과였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나는 고구려사관이나 신라사관은 둘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이북이나 이남이나 공히 고려를 조선보다 우월하게 인식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역전되었다. 일본인들이 왜곡하고 은폐했던 조선사 자료들이 90년대 들면서 적극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사에서는 고조선이 고구려 이상으로 광대했었다는 점이 새로이 부각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이 점을 내세우니까 자연히 백제와 신라가 소외된 것이다. 한편 조선은 (고)조선을 계승한다고 하여 국호도 똑같이 조선으로 정했다.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보수 사학자 한영우의 저작이다. 그런데 이 통사는 이미 한국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저작물로 올라서 있다. 1997년에 초판 발행된 이 책은 2004년 전면 개정판을 냈고, 최근에 다시 2차 개정판을 내는 동안 도합 51쇄가 간행되었고 영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우리 민족은 고려와 조선을 합쳐 1,000년 이상이나 통일국가체제를 유지해 왔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현대사의 정통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고려와 조선, 그 중에서도 최근세인 조선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한영우 교수가 1996년 삼성경제연구소 21세기 문화연구원에 기고한 조선역사에 관한 논문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 길>을 발췌해서 요약, 제시한다.

- 5,000년 역사를 통해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한 마디로 말해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 길을 걸으면 일류국가가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일류국가가 되려는 꿈은 오늘의 우리만이 아니라 옛날의 조상들도 똑같이 지니고 있었고, 실제로 그 시대의 수준에서 일류국가를 부단히 재생산해온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국이라고 지칭하고 우리나라 사신을 주변 여러 나라 사신 중에서 가장 상석에 배치하면서 극진히 우대했다. 우리나라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국력을 기울일 정도로 후대를 받은 것도 우리가 일본보다 일류국가였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는 20세기 100년을 빼고는 언제나 일류국가로 살아왔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이 일류국가를 유지해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 국가경영철학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하고,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면서 다른 나라의 강점을 배우자는 것이다.

이 평범한 듯한 조상들의 지혜가 오늘날에 와서 새삼스레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난 20세기 우리가 걸어온 길이 우리 조상들이 선택한 길과는 매우 다르다는 데 있다. 지난 20세기 우리는 법고창신이 아니라 ‘멸고창신’, 동도서기가 아니라 ‘서도서기’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조상과 역사를 무시하거나 비하하고, 서양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해온 것이 사실 아닌가? 특히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의 의식에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여 전통과 역사가 단절되는 이상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법고’는 이른바 주체성이요, ‘창신’은 도덕성과 과학성을 높이는 수단이다. 비단 왕조 창업기에만 법고창신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왕조 중흥기에도 법고창신의 정신에 의해 국가의 문물을 혁신시키고 국가의 생기를 회복시키면서 왕조의 수명을 장수(長壽)로 이끌어갔다.

특히 조선왕조는 여러 왕조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전통문화의 한국적 특색이 가장 세련되게 발현된 것이 이 시대이고, 선진 중국문화를 가장 열성적으로 수용한 것도 이 시대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의 천주교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상대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정면으로 파괴하려는 침략성을 드러내지 않는 한,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외래문화를 섭취하여 온 것이 우리 조상들의 기본자세였다.

조선왕조가 비록 일본의 무력에 의해 국치를 당했다 하더라도 침략자를 비난할 일이지 조상을 탓할 일이 아니다. 신사(紳士)가 불량배에게 맞았다 해서 신사를 나무랄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제는 조선왕조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이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21세기 신문명을 창조하는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일본인들은 장인정신이 투철하여 무슨 물건이든지 천하제일로 만든다고 한다. 일본에는 200년 이상이나 대물림하는 국수집이나 추어탕집이 적지 않다. 일본인들의 장신정신은 따지고 보면 조선에서 배워간 것이지만 그들의 절제된 생활철학 덕분이면서도 아울러 신분상승이 어려웠던 일반 서민들로부터 발현된 자구책이이기도 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이후 출판인쇄문화의 발달로 교육기회가 넓었으며, 배움이 있으면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가 가능한 사회였다. 일본인에게는 출세의 사다리가 없었다. 그들의 출세 수단은 칼솜씨였지 학문이 아니었다.

우리나라가 유학 때문에 과학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는 속설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갖지 못한 인문적 교양과 전인적 사고력은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는 일류국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고급 지식인 가운데 우리 역사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비하하는 버릇을 가진 이가 있다.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식민사관에 있지만 이에 넘어간 지식인들의 책임도 크다. 그들은 근거도 없이 유학을 사대주의와 허례의식으로 비판하고 대외투쟁을 통한 영토 확장에만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고대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조선 왕조사를 낙후, 침체된 사회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서양에서 들어온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에 침윤되었기 때문에 사실 제국주의자의 역사 해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이광수 등 식민지 시대 전통문화를 비하한 지식인들은 대부분 친일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를 어떻게 보느냐는 21세기 일류국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드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는 20세기 형 ‘멸고창신’과 ‘서도서기’의 국가를 21세기에도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 조상이 물려준 ‘법고창신’과 ‘동도서기’의 국가경영철학을 계승하여 역사의 맥을 계승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있다. 분명한 것은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두보(杜甫), 가장 인민 친화적인 시인

방대한 양의 한시 중에서 두보(杜甫, 712~770)를 선택한 것은 그가 중국 굴지의 시인이기도 하지만, 이에 앞서 두보는 가장 인민 친화적인 시인이라는 이유에서이다.

두보의 시는 조선 시대 성종 대와 인조 대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번역(언해)집을 펴냈다. 두보는 이백과 함께 중국의 양대 시인으로 평가된다. 우리가 들었듯이 이백이 시의 신선(詩仙)이라면 두보는 시의 성인(詩聖)으로 칭송된다.

천재적이고 귀족적이며 낭만적인 이백과 달리 두보는 노력형이고 서민적이며 사실적인 시를 썼다. 그는 59세의 삶을 사는 동안 1,450수의 정형시를 남겼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동아시아에서 두보를 연구한 박사 논문만 해도 1,000편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중국어에 미숙한 우리는 한시의 음악성을 읽을 수는 없다. 한시에는 음수율과 음위율과 음성률이 들어 있다. 한문을 어느 정도 알면 음수율과 음위율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고는 소리의 고저장단을 이루는 음성률, 즉 사성법을 감상할 수가 없다.

조선 시대 번역에서는 원시의 음악성을 살리려고 5언시는 5개 어절로 7언시는 7개 어절로 재현했다. 아마 조선시대 번역을 맡은 사람들은 중국어에도 능했으리라고 본다. 나는 한문 실력도 온전하지 않고 중국어도 잘 못하지만 감히 두보의 대표시 몇 편을 골라 번역해 보기로 한다.

1. 절구 2수 가운데 한 수다. 이 시에는 제목이 없다. 절구는 4행 구성의 시를 말한다.

강이 푸르니 새가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이 불타는 듯하다
올봄도 고향에 못 가고 지나가니
어느 날에 내가 돌아간단 말인가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2. 춘망(春望, 봄의 경치)

나라가 무너졌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성안의 봄날에 초목이 무성하도다
시절을 느끼니 꽃을 보면 눈물이 나고
이별을 슬퍼하니 새가 마음을 놀라게 한다
봉홧불은 석 달째 타고 있어서
집으로 편지 한 장 부치는 데 만금이 든다
흰 머리를 긁으니 숱도 제대로 없어
이제는 다 합쳐도 비녀조차 꽂을 수가 없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3. 망악(望嶽, 태산을 바라보다)

태산은 어찌하여
제나라와 노나라를 푸른빛으로 이어 놓았는가
조화가 신수함을 모았고
산의 양지와 음지가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았구나
층층이 피어나는 구름에 가슴을 훤히 열고
날아오는 새를 눈이 찢어질 듯 쳐다본다
마땅히 정상에 올라
세상 모든 산이 작음을 한 번 보리라.

岱宗夫如何 齊魯靑未了 造化鍾神秀 陰陽割昏效
蕩胸生曾雲 決眥入歸鳥 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4. 빈교행(貧交行, 가난할 때의 우정)

손을 뒤집어 구름을 만들고 손을 엎어서 비를 만드니
무슨 수로 세상에 속되고 가벼운 사람을 다 셀 수 있으랴
그대는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시절 우정을 알지 못하는가
이 도를 지금 사람들은 흙같이 버리는구나.

番手作雲覆手雨 紛紛世事何須數
君不見管鮑貧時交 此道今人棄如土

5. 등고(登高, 높은 산에 오르다)

바람이 빠르며 하늘이 높고 원숭이의 휘파람소리 슬프니
맑은 물가 흰 모래에 새가 날아 돌아오는구나
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나리고
다함이 없는 긴 강은 굽이굽이 흐른다
만리타향 가을이 슬픈 나그네가 되어
평생 잔병에 시달리어 홀로 산에 오른다
간난에 서리같은 귀밑털이 어지러움을 몹시 슬퍼하면서
흐린 탁주잔을 나노 모르게 멈추고 말았다.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廻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袞袞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鬢 潦倒新停濁酒盃

6. 강남봉 이구년(江南逢李龜年 강남에서 명창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의 집안에서 늘 보았고
최구의 집 앞에서 몇 번을 들었던고
참으로 이곳 강남의 풍경이 좋으니
꽃 지는 시절에 또 너를 만나는구나.

岐王宅裏尋常見 崔九堂前幾度聞 正是江南好風景 落花時節又逢君

7. 등악양루(登岳陽樓, 악양루에 오르다)

지난날 동정호수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침내 오늘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과 남으로 갈라졌고
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 있도다
친한 벗이 한 자 편지도 없으니
늘어가는 시간 외로운 배 한 척뿐이다
싸우는 말이 관산 북녘에 있으니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노라.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

8. 강촌(江村)

맑은 강의 한 굽이가 마을을 안아 흐르고
긴 여름 강촌에 일마다 그윽하도다
스스로 갔다가 스스로 오는 것은 집 위의 제비이고
서로 친하며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 갈매기로다
늙은 마누라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고기 낚을 낚시 바늘을 두드린다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약인데
조그만 몸이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淸江一曲抱村流 長夏江村事事幽 自去自來堂上燕 相親相近水中鷗
老妻畵紙爲碁局 稚子敲針作釣鉤 多病所須唯藥物 徵軀此外更何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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