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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꿀 수 있는 100권의 책 50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가능한 일일까
김갑수 | 2018-01-26 13:39:2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가능한 일일까 (1)
- 무라야마 담화, 미시마 유키오와 후쿠자와 유키치

“우리나라와 한국과의 관계는 신대(神代)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삼한을 정벌함에 따라 여기를 복종시켰고 히데요시가 출병하여 일본의 강함을 보여 주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교를 맺었으며, 나아가 보호국으로 삼았는데 위기의 시대를 맞이하여 한국 황제는 국토를 메이지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께서는 동양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것을 받아들이셨고, 한국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싸우지 않고 영토를 넓힌 것은 천황의 인덕에 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위는 일본 쿄토 인근 미야케하치만 신사 경내에 있는 한국병합봉고제비 비문의 주요 내용이다. 1910년 일본인들은 한국을 병합한 것을 자축하는 행사를 벌이고 이것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이를 천황에게 아뢰는 제사를 올린 것이다.

일본인들은 고대의 진구황후 전설에 근거하여 삼한병합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1910년의 일한병합을 조선인의 자원에 의한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문장을 만든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모두 당시 일본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니고 있던 역사학자와 정치인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터무니없이 왜곡, 조작된 역사를 아직도 일본인 다수가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일본 정치인들일수록 더 심하게 표출된다. 그런데 일본 정치인들이 무뇌아가 아닌 이상 자기 나라의 침략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일본 지도자의 발언 가운데 가장 진일보한 것으로 꼽히는 것이 종전 50주년인 1995년에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다.

“일본은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국책을 그르쳐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하여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다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으로부터 사죄하는 감정을 표명합니다.”

1995년 당시 한국의 신문들에 의해 일본 수상이 ‘통석의 염(痛惜의 念)’을 표명했다고 대서특필된 이 담화에서 무라야마는 제 나름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인정, 사과했지만 정작 1910년 일한병합의 불법성 여부를 묻는 구체적인 질문에는 끝내 말문을 흐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빼앗은 것이 부도덕한 침략 행위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한합병조약의 불법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술 더 떠 요즘 일본 정치인들은 무라야마 담화조차도 재론하기를 주저하면서 아예 침략 사실 자체도 시인하지 않는 쪽으로 바뀌고 있으니 이것은 또 뭔 일이라는 말인가?

일본인들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들은 총궐기(?)한다. 침략 부인이건 위안부건 독도건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들은 외친다. ‘망언을 규탄한다’, ‘일본군국주의 책동을 저지하자’고. 한국에서 국론이 일거에 일치되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다.

이 단순함, 이 즉흥성, 이 피상성 그리고 이 동어반복성을 반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본을 극복하지 못한다. 아니 식민지 청산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왜 일본이 저러는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고작 한다는 말이 ‘독일은 반성하는데 일본은 안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프랑스는 청산했는데 대한민국은 안 한다’고도 말한다.

일본은 왜 조선 침략을 부인하는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은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 침략을 시인케 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염두에도 두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없는가? 그것을 한다면 누가(어느 나라) 적임자일까? 일본이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중심국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지금까지 중심국가이기는 했는가? 이전에 일본은 정상국가였는가?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에 불과]

오늘날 중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쑨원(孫文)은 1924년 고베에서 행한 강연 ‘대아시아주의’에서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라고 물었다. 3·1항쟁 때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조선의 독립(토록 하는 일)은 일본이 사악한 길로부터 나와 동양을 지탱하는 나라로서의 중책을 다하게 하는 일’이라는 언명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 패도의 앞잡이 역을 포기하지 않았고 특히 조선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았다. 대미전쟁에서 일본 군부가 마지막까지 항복을 거부한 것은 기실 조선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와 군부가 패전의 막바지까지 골몰했던 것은 조선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영구히 확보하는 일이었다.

일본이 소련에 평화교섭 중재를 요청했을 때의 조건도 이것이었으며, 만주국 주둔 관동군의 최종 배치 역시 조선반도 확보를 목표로 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일본의 조선 욕망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새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드넓은 만주와 대만과 동남아시아를 포기하면서도 왜 조선만은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바로 이 의문을 푸는 것은 조선이 왜 망했는가를 규명하는 일과도 맞물려 있다.

나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크게 왜곡된 역사는 근·현대사가 아니라 조선사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조선이 못나서 망했다고들 한다. 좀 유식하게 말해서 ‘조선은 자체 모순으로 망했다’라고도 한다. 아니면 ‘일본이 잘 나서 조선을 먹었다’고들 한다. 좀 더 유식하게 말해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조선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언하자면 이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한 역사 인식이 아니다.

조선은 동학과 의병전쟁에서 5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다. 조선의 관리, 학자들 중에서 자결로 항일한 사람의 숫자는 부지기수로 많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일한병합을 고시한 조칙에 끝내 서명을 하지 않았다.(일본인들은 강탈한 국새만을 찍었을 뿐이다.) 속된 말로 해서 조선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미시마 유키오와 후쿠자와 유키치]

“1993년 미국 의회는 하와이 병합의 기원이 되었던 1893년 하와이 왕국 전복의 불법성을 인정하여 사죄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러한 선례를 배워 일본에서도 한국 병합 100년을 맞이하여 국회 의결이든지, 각의 결정에 기초한 총리 담화로든지 새로운 역사 인식을 보여 주기 바란다.”(와다 하루키, 「한국 병합 100년과 일본인」)

아마도 한국인 같으면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본인 학자로서 하기 힘든 양심적인 발언을 했다’고 칭찬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최근 아베 정권은 일본의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서 주변국의 지탄을 받았다. 아베가 아니더라도 일본의 정치인들은 툭하면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망언을 해대곤 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침략 사실을 부인하는 것일까? 그들이 정말 침략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1995년 당시 일본 수상 무라야마는 일본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침략 사실을 시인하면서 주변국에 사과의 뜻을 표한 바가 있다.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로 불리는 이것은 위에 제시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우리가 괘씸하게 여기는 아베의 침략 부인 발언은 참의원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1995년의 수상 무라야마와 지금 수상 아베의 역사관은 조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아베 부류의 일본인들을 무조건 규탄하지만 무라야마 부류의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정말 한국인들의 반응대로 아베는 틀리고 무라야마는 맞는 것일까? 같은 맥락으로 위에 제시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주장은 합리적인 것일까?

와다 하루키는, 미국은 하와이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했지만 일본은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와다 하루키 식의 역사관을 수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국이 하와이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인 것이지 미국이 양심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와이는 미국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이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인정할 경우 배상 문제가 불거진다. 특히 조선(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일본 정치인이라면 옳건 그르건 간에 배상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한다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요구할 것임이 틀림없는 조선(북)은 아베의 발언도 규탄했지만,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도 반대의 뜻을 명백히 한 바가 있다. 사실 1995년의 무라야마까지도 비록 침략 사실은 사과했지만 조선병합의 불법성을 묻는 질문에는 끝내 답변을 흐렸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일본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먼저 일본에는 명백히 두 부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시마 유키오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불러낼 필요가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1925~1970)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였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대 이후 망각되어 버렸다. 그는 1970년 ‘자위대의 혁명’을 외치며 할복자살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그를 ‘극우 또라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을 감행하면서 외친 핵심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군국주의의 부활’이 아니라 일미동맹의 해체였고 평화헌법의 개정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미국에 노예처럼 종속되어 있는 ‘조국의 현실’에 가장 섬뜩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조국의 ‘자주’를 절규하며 죽어간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미시마 유키오가 한갓 ‘불온한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1936년 일본 장교들이 일으킨 소화 쿠데타의 사상적 지도자 이타 이키는 미시마 유키오의 선배 격이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지금도 일본에서 가장 추앙받는 지식인이자 언론인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을 비롯한 친일 개화파가 주동이 된 갑신정변(1884년 12월4일)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린 지 꼭 100일째가 되던 1885년 3월16일 그는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에 논설을 게재했다.

이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조야(朝野) 가릴 것 없이 모두 서양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오로지 일본의 낡은 틀을 벗는 것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축으로 하여 주의(主義)로 내세워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탈아'(脫亞)라는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한 서구문명화와 탈아론은 기실 “중국과 조선을 접수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와 침략주의의 방편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행 일본 지폐 중에서도 가장 고액인 1만엔권에 초상이 박힌 그에게는 국민국가론의 창시자, 민권론자, 국권론자, 자유주의 경제학자, 절대주의 사상가, 국민의 교사와 같은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는 한국의 ‘개화 선각자’로 오인되고 있는 김옥균, 윤치호, 이광수 등이 하나같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나아가 우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장을 실현시킨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실을 추가하여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 - 이토 히로부미 - 무라야마’가 있다. ‘기타 이키 - 미시마 유키오 - 아베’가 있다. 전자는 선하고 후자는 악한가? 전자는 안전하고 후자는 위험한가? 전자는 우리에게 유익하고 후자는 우리에게 해로운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두 부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어느 것이 더 우리가 대처하기 어려운가의 문제를 따진다면 미국을 등에 업고 합리적, 이성적, 문명적인 척하는 전자가 더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일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한다고 규탄한다. 일본군국주의는 부활할 수 있는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일부에서 군국주의 부활의 책동은 있을 수가 있겠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 중국과 조선(북)의 미사일은 태평양 연안 도처에 산재한 일본의 핵발전소들을 마음만 먹으면 타격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세력이라면? 그들은 여간해서 망언도 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그들과 미국의 잇속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라면 더욱 해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군국주의 부활을 말하지 말라. 대신 일미동맹의 해체를 외쳐야 한다. 한미동맹은 일미동맹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다. 싫건 좋건 궁극적으로 일본과 한국은 이 사슬을 풀기 위해 공조해야 한다. 그리하여 일본과 미국 사이(미일동맹)도 풀어지고 한국과 미국 사이(한미동맹)도 풀어지며 조선(북)과 중국 사이(조중동맹)도 풀어져서 아시아 각국이 정상적인 자주국가로 부활하게 될 때, 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은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없는 ‘미국의 주니어’ 일본에게서 배울 것 없다 (2)

21세기 들어 일본은 아시아에서 주변국으로 밀려나고 있다. 싱가포르 홍콩 대만의 국민소득은 일찌감치 일본을 앞질렀으며 한국도 일본 국민소득의 90% 선까지 육박해 들어갔다. 일본의 국가 경제력이 중국에 밀린 지는 오래고 이제 머잖아 인도에도 뒤질 것이 확실시된다.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가 원만하지도 않으며 중국과는 소원하고 조선(북)과의 관계는 거의 적대적인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지진, 태풍, 화산폭발 등 자연재해의 공포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워 본 적이 없는 나라다.

나는 지난 몇 차례의 글에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비판한 바 있다. 물론 나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근대화’라는 것을 이룸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올라서는 토대를 마련한 것까지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라는 것은 미국에의 종속화를 유발했고, 제국주의란 결국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침략주의와 하등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제국주의는 ‘주의’라고도 할 수 없으며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그것은 ‘강도 근성’과 같은 것이다.

더욱이 일본의 제국주의는 1930년대에 들면서 한 단계 더 악화된 군국주의로 치달음으로써 수십억 아시아인에게 막대한 고통을 주었다. 여기서 간과되어서 안 되는 것은 이로 인해 타국민뿐 아니라 일본 자국민들도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았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의 강점은 경제에 있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경기를 삽시에 되살려 놓았고 이후 전개된 미소냉전체제는 일본 경제에 엄청난 특혜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일본은 경제를 얻는 대신 정치와 문화를 포기해야 했다. 민족의 주체성 따위를 언급하는 것은 불온시 되었다. 결국 일본이 미국 발 경제발전에 도취하면서 얻은 것은 ‘문화적 망각’이라는 정신병이었다.

사실 일본의 후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인 19세기 중엽까지 아시아의 중심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주변 국가였던 나라가 다시 주변 국가로 되돌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한 일 아닐까?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논문, 「일본사 인식의 페러다임 전환을 위하여」에서, “현재 일본은 경제적으로 어떨지 몰라도(그것도 상당히 이상하게 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주변 여러 국가에 뒤쳐지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관점은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제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

단언하건대 나는 일본이 다시 아시아의 중심국가가 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문화적 망각’이라는 정신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구화·근대화에 탐혹된 나머지 전통적인 동양정신, 즉 아시아 사상을 팽개쳐 버렸다.

21세기 들어 세계의 힘은 3대 중심권으로 모아지고 있다. 미주와 유럽과 동아시아권이다. 그런데 미주는 쇠퇴, 유럽은 정체, 동아시아는 비약하고 있으니 향후 수십 년의 판도는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결국 동아시아의 중심국이 되는 것은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할 때가 임박했다.

[쿠데타 혼(魂)을 심어준 일본 ‘소화정변’의 군인들]

아베는 태평양전쟁의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이다. 그는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종군위안부를 “꾸며낸 얘기”라고 공언하는 일본 정치인이다. 일본에서 극우파가 다시 집권한다는 것은 한국에 대단히 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에서 극우가 권력을 쥐었던 시간에는 어김없이 한국인의 긴장과 불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미국과 중국과 일본 세 나라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특히 일본은 한국을 무력 지배한 나라이며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일본 극우세력의 발호는 한국 보수반동의 동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한국의 보수반동들에게는 일본의 극우세력을 효칙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는 일본 극우세력의 쿠데타 혼(魂)을 이식 받은 것이다.

1937년 일본 관동군 육군 수뇌부는 자작극으로 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 측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며 전장을 확대한다. 관동군은 만주와 외몽골 그리고 화북까지 전선을 넓혀간다. 당연히 호전적인 관동군 병력이 소련 군사 주둔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북에서 관동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만주 지배권을 확실히 못 박는 선에서, 중국과 휴전하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일본 육군본부는 이에 반대했다. 피 흘리며 화북까지 쳐 올라간 제국군대의 ‘대화혼(大和魂)’에 흠집을 낼 수 없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 시내에 폭설이 내렸다. 시내 전부가 하얀 눈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미명이 걷혀가는 새벽이었다. 때 아니게 요란한 총성이 겨울의 냉기를 찢었다. 시민들은 시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지역에서도 총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 날 아침 도쿄 시내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린 지역은 줄잡아 10곳 이상이었다. 시민들은 총성이 울린 곳이 하나같이 정부요인이 사는 동네란 것을 알아차렸다.

첫 총성이 울리고 불과 24 시간 동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수상은 굴뚝 속으로 몸을 숨겨 목숨을 겨우 건졌지만, 일본제국의 내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황의 측근들마저 추가로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황의 궁정대신까지 죽인 것은 실수였다. 아무튼 경시청과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1,500명의 육군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겁 없는 청년 장교들이었는데. 그들은 호전적인 관동군 수뇌부와 교감하던 (마치 박정희와 전두환의 하나회처럼)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사를 ‘명치유신’에 버금가게끔 ‘소화유신’이라고 명명했다. 난동 청년 장교들의 서슬에 공포를 느낀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들을 사태 수습의 계엄군에 편성시켜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들의 유혈거사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는다는 천황(실감을 위해 일본식으로 호칭함)이었다. 천황은 나름대로 그들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황은 지체 없이 쿠데타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철없고 흉악한 것들이 내 오른팔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더니, 이제는 내 목까지 조이려 드는구나.”

천황은 쿠데타군을 즉각 제압하라고 명령 내렸다. 천황의 일갈로 사태는 일순 역전되고 말았다. (아마 일본인들만큼 종교적인 민족도 없을 터이다. 이는 태풍이나 지진, 화산 폭발 같은 자연 조건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당시 천황은 일본 종교의 살아 있는 교주였다.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달은 주동 장교들은,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천황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칙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했다.
천황은 즉각 응답했다.

“죽든지 말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라.”

천황은 칙사 파견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주모자 17명을 체포해 사형에 처해 버렸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성향에는 전에 없던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종교기질보다 파시즘이 더 우세하게 된 것이었다. 수많은 수구꼴통들이 생겨나면서 청년 군인들이 외쳤던 이른바 ‘대화혼’에 공감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후 파시즘의 광기가 일본 열도를 휩싸게 된다. 결과로 일본은 350만의 병력 중 200만이 넘는 병력을 대중국 전에 투입해야 했고, 이는 태평양전쟁의 도발과 패망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일 역사가들은 2.26 쿠데타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다. 쿠데타란 국가에 대한 강간과 같은 것이어서 국민의 심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소화정변이 그렇다. 오늘날 아베 등의 일본 현대 극우파들은 이 쿠데타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2·26 쿠데타의 잔여자들이 모두 박정희의 선임자들이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박정희는 일본 소화정변 주모자들을 흠모하는 군인이었다. 친일과 독재는 뿌리를 공유한다. 요컨대 일본군 소화정변의 ‘대화혼’이 이식되어 5·16 쿠데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우익의 영원한 바이블, 『국가개조안원리대강』]

1936년 일본 장교들의 2·26 쿠데타로 사형 당한 17명의 주모자 가운데에는 유일한 민간인이 있었다. 그는 청년 장교들에게 극진히 존경 받던 기타 이키였다. 19세에 오른 눈을 잃어 외눈박이가 된 그는 23세 때인 1906년에 『국체론 및 순정자본주의』라는 이념서를 자비로 출간했다. 이 책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버금가는 역저'라는 서평을 받았다.

기타 이키는 일찍 중국에 건너가 손문이 조직한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는 손문의 혁명이 성공하자 상해로 가서 중국국민당 대표였던 송교인(중국혁명의 실력자, 한국 독립운동가 신규식과 각별한 사이였으나 변절한 동지에게 암살됨.) 등과 친교를 맺고 이후 8년 간이나 중국 혁명을 도와주었다.

기타 이키는 일본 정부가 손문을 돕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중국을 도와서 중국으로 하여금 소비에트와 전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는 영일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영국을 동양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있는데, 이 해방의 전 과정은 동양의 맹주 일본이 사상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는 동양 대 서양의 대결이라는 호전적인 명분으로 포장하면서 일본의 ‘동양맹주론’을 전제화한 셈이었다. 다시 말해 동양의 패권은 당연히 일본이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일본의 젊은 장교들을 감동적으로 사로잡았다. 그 결과 젊은 장교들은 중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선결과제로 믿게 되었고, 이것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이념적 원동력이 되었다.

기타 이키는 손문이 원세개와 협상하자, 중국 혁명 정신이 퇴색했다고 비난하고, 상해로 돌아가 저작에 몰두한다. (그 당시 상해는 동서양 문물이 혼재하는 출판문화의 도시였다.) 얼마 후 그는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이 책은 그의 혁명 사상과 세계질서 개조방법론을 담은 학술서였다. 이 책은 그의 귀국과 함께 일본에서 붐을 일으켜 ‘일본 우익의 영원한 바이블’이 된다.

기타 이키는 일본의 참다운 유신을 위해 당, 군, 관료, 재벌의 제거를 주장했다. 그는 천황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일본의 헌법을 3년 간 무효화하고, 귀족원과 중의원을 해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정액 이상 세금 납부자에게만 있었던 선거권을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주어 다시 선거를 해서 국가개조회의를 구성하자고 외쳤다.

기타 이키는 일본이 아시아의 수령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한국이 언어와 풍습의 차이는 있지만, 원래 일본에 딸린 지방이므로, 북해도와 동등하게 서간도의 지위를 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영토가 필요하므로, 극동 시베리아와 호주를 점령해야 하며, 이를 위해 무제한으로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타 이키는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을 완성한 후, 자기 일은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복음의 실천은 젊은이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는 암자에 틀어박혀 법화경을 암송하면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맞이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자기더러 보살이라는 칭호를 쓰도록 했다. 모두가 그를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자, 그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결정적으로 선동적인 발언을 터뜨렸다.

“보살의 출현은 혁명의 성취를 예언한 것이다.”

기타 이키는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선창한 것이고, 이후 일본제국의 정책은 거의 그의 선창을 추종했다. 결국 그는 일본 제국군인의 영적인 스승이었고,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의 교주가 되었다. 쿠데타로 처형당한 한 장교는 다음과 같은 옥중 유언을 남겼다.

“영원한 스승 기타 이키의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은 단 한 자, 단 한 획의 수정도 없이 실현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라도 그를 폄하하거나 훼손하는 일을 방임해서는 안 된다.”

기타 이키의 저서는 일본 우익의 영원한 바이블이다. 일본 우익들의 심리적 근저에는 ‘동양맹주론’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과 가까워지더라도 좀 더 알아야 한다. 어째서 기타 이키 같은 인물이 출현했고 그가 삽시에 영웅으로 부각되었을까? 이것은 극우를 표방하는 아베 신조가 인기를 얻는 이치와 흡사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역사 교육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왜 미국에 전쟁을 걸었을까]

아마도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몇을 고른다면, ‘크리스마스’나 ‘오케이’나 혹은 ‘팍뀨’ 등이 되겠지만 ‘리멤버’도 그 다음 정도에는 들 것이다. 미국인들은 1836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엘라모를 기억하라 Remember the Alamo!"라고 했고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때에는 “메인 호를 기억하라 Remember the Maine!"고 외쳤다.

그러나 “진주만을 기억하라”만큼 미국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리멤버’는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일본의 공격이 선전포고조차 없는 기습이었고 게다가 일약 세계 제일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미국의 존재감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은 반일감정이 생길 때에는 진주만을 ‘리멤버’ 하자고 말하고는 한다. 한국인들이 외치는 “상기하자 6.25”에서 ‘상기하자’는 미국의 리멤버를 흉내 낸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인에게는 또 하나의 리멤버가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9.11을 ‘리멤버’ 하자는 것이다.

진주만 기습 다음 날 미국의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 의도적인 침략을 극복하는 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 국민들은 정의의 힘으로 절대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끝까지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이런 형태의 배신이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 의회와 국민의 뜻을 바로 해석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교전 상태는 존재한다. 우리 군사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함께, 우리 국민의 무한한 결의와 함께, 우리는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신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나는 12월 7일 일요일, 일본에 의해 비겁한 공격이 이루어진 이래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회가 선포하기를 요구한다.”
- 이상 1941. 12. 8 프랭크린 루스벨트 의회 연설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 것은 굶어 죽으나 맞아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식의 딜레마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것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사용한 전비는 2억 3.000만 엔이었다. 미국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무려 7조 엔의 전비를 지원해 주었다. 영국은 일본에 각종 군사시설을 제공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했다. 루스벨트가 연설문에서 일본에 ‘배신’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이런 은폐된 역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일본 군부의 욕망은 대만과 조선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일약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원유 공급을 중단하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일단 미국을 공격하여 유리한 국면을 만든 다음 적당한 선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목적으로 미국에 전쟁을 건 것이었다.

일본 시각 1941년 12월 8일 새벽 3시 19분, 워싱턴 시각 12월 7일 낮 1시 19분, 하와이 시각 아침 07시 49분, 일본 전투기 편대는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폭격은 2차에 걸쳐 90분 간 맹렬히 계속되었다. 일요일 아침 진주만의 미국 함정은 18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300여대의 전투기가 부서졌고,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은 미국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을 격침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기습 공격의 목적을 십분 달성한 것으로 본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어로 호랑이를 뜻하는 “도라, 도라, 도라” 무선 암호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공습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보고였을까? 일본의 전황 보고는 첫 전투에서부터 부풀려지고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미국의 항공모함은 그곳에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불구로 만들었다는 군함들, 이를테면 메릴랜드 호를 비롯한 6척은 불과 몇 주 만에 말짱히 수리되어 훗날 사이판, 유황도, 오키나와 등의 해전에서 다시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의 항공기들이 미국의 중유저장탱크나 선박수리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이 두 곳이 온존했기에 미국은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중유저장탱크에는 당시 일본의 2년 생산량과 맞먹는 450만 배럴의 석유가 저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원의 중요성을 무지하리만치 간과해 버렸다.

그리고 함정 몇 척과 비행기 몇 백 대를 더 파괴하려고, 기습 공격한 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선전 각서를 미 국무성에 제출한 일본의 잔꾀는 미국의 조야와 국민 전체를 순식간에 분노, 단결시켰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전투력보다 훨씬 중요한 정신력을 일본이 미국에게 만들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군부는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면 국제 여론의 비난을 사 오히려 전쟁에 불리하다는 외무성 관리들의 건의를 묵살했다. 그들은 개전 20분 전에야 주미 일본 대사관에 각서를 암호화하여 보냈다. 여기에다 암호 해독에 서툰 대사관 직원의 지체까지 겹쳐 실제 공격 후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각서가 미국에 전달된 것이었다. 진주만이 불바다임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전달된 일본의 각서가 미국의 정치인들을 얼마나 분격시켰을는지는 상상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각서의 내용도 도저히 선전포고라고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문구로 되어 있었다. 미국의 헐 국무상은 각서를 가지고 온 노무라 일본 대사에게, “지구상의 어떤 정부도 일본 정부만큼 기만적이지는 않다. 공직 생활 50년에 이렇게 허위와 왜곡에 가득 찬 문서는 처음 본다.”라고 말했다.

요컨대 일본은 가장 무모한 방법으로, 바늘로 미국의 발바닥을 찌른 형국이었다.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액은 1,100억 달러로서 일본의 12배였다. 철강 생산량은 20배, 석탄은 10배, 전기와 알루미늄은 6배였다. 비행기는 5배, 자동차는 450배, 석유비축량은 14억 배럴로 일본의 700배였다.

태평양전쟁은 약자가 강자에게 먼저 싸움을 건 역사적으로 아주 희귀한 예가 되는 전쟁이었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것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달성한 세력 구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독일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그 멀리 있는 독일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 태평양에서 일본을 지원할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삼국동맹은 일본에게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한 채 미국의 경계심만 자극한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에 제동을 걸었으며,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에 석유 금수 조치로 대응했다. 당시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에 미달하는 양밖에는 되지 못했으니, 일본의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때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고 중국에서의 이권을 대폭 양보했더라면 미국과의 절충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만약 이렇게 되었을 경우 한국의 식민지 상태는 훨씬 길어졌거나 영구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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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민폐  2018년1월26일 16시53분    
우리 이니 마음대로하소서

갑수같은 분들 보기에는 참으로 천박하고 가소롭고 맹종스러운일
그러나
일본을 배워 알아야한다는데
천왕으로 상징되는 일본 우리 이니 마음대로하소서와 다른게 뭰지

조선건국의 시발점 3불가론으로 상징되는 입만 동동 뜨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그놈의 피상적 이빨삼치기 논쟁보다 행으로 보여주엇던 무모한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일본의 이익위해
기꺼이 트럼프 푸들 자청해 마지않은 일본의정책과 아베

무엇이 보이십니까
일몬 배워서
그걸 어데다 쓰시려구요

우리이니 마음대로 하소서로 국민들 마음 하나로 모아지면
개인 역량.자존심은 개털돠고
나라 망합니까

하나를 배워도
똑바로 배워야

군국주의 부활
아이고 의미없다
돈,기술,경험에다 현실적으로 시동만 켯어도 우리보다 군사력 쎈디

일본에서 배울것 없다굽쇼
거의 모든 우리 지식기반 , 경제는 말해 무엇해
일본통해서 배워놓구
이제와서 더이상 배울게 없다굽쇼
흐미

자나깨나
우리 한마음 되어 그 힘으로 남북 하나되믄

일본도 상대할만할것
(66) (-45)
 [2/2]   민폐  2018년1월26일 19시10분    
사람이먼저다 추구하는 정부맞나 ?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유감
한겨레 21 김학선덕후

이런 사고인식을 가진놈이 버젖히 덕후행세하고, 또 이따위글을 게재 시키는 한겨례21이나
참으로 가관이구나
필드에 10번 나갈 기회 8번으로 기회상실되어 개인희생이라 주장하면 할말이 없겟으나
그나머지 주장들은 괘변 이기에 그러하다
스포트라이트받아 좋고
지원 한푼이라도 늘어나면 돈 벌어좋고
국가에 애국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구
도데체 뭬가 문제인데

일방적 통보에
왜 하필 여자 아이스하키 팀 이냐굽쇼
그럼 왜 이명박양때는 법으로 그것도 일반법에우선하는 특별법으로 애걸복걸
불과 1달전
전쟁 난다는데 단일팀 논의하냐

퍼주고 과공비례하여 돌아온것은 결국 핵
그럼 엄연한 유엔가입 독립국가
감나와라 배나와와라 하는것은 사치
오직 할수있는 단 하나
미국 선택 님의선택에 맞길수밖에
(64)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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